[칼럼]과학(책)도 (기계)번역이 되나요? [1]

블랙소스
2024-04-08


전공은 수리물리학. 

또는 mathematical physics. 대중에게(때로는 전공자에게조차, 따라서 그 사이에 위치할 수 있는 독자 모두에게도)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 일부를 밝히면, 특히 한국에서는 여전히 많은 분들이 의아해 하신다. '여전히'라고 굳이 쓴 까닭은, 과거보다는 덜하지만, 아직도 이런 반응이 낯설기는 정도 차이 외에는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물리학과치고도 필자가 학부를 보낸 학습 환경에서는 다소 색다른 커리큘럼의 면면이 보이던 과목이 수리물리학과 물리수학이었다. 수리물리학이란, 어떤 연구 분야로서보다 본격적인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수강해야 하는 전공 필수 과목명으로 훨씬 더 익숙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과목명이라고 해도 '물리수학'이란 표현은 좀처럼 쓰지 않기도 했고.

수리물리학은 어떻게 보면 방법론이 강조된 명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상에 주안점을 두고 입자물리학이라고 하면 조금은 덜 생소하시는 듯하다. 아울러, 소립자물리학이라면, 좀 더 친숙하다는 의미의 반응이나 신호가 보이기도 한다. 영어로 표현해 보면, particle physics 또는 elementary particle physics인데, 도구, 엄밀히는 방법론적 도구(수학)가 아니라 물리적 도구를 강조하는 관점의 명명은 고에너지 물리학(high-energy physics)이다. 입자가속기의 에너지가 높기 때문이다(단, 이 때도 '높다'는 표현도 아주 상대적 기준에서 비롯된다.).

다시, 전공이 뭐냐고 했을 때, 가장 매끄럽게 지나가거나 대화가 이어지는 답은, 필자의 경우, 블랙홀이다. 아마 이쯤에서 오히려 더 의아해 하실 분들도 계실 텐데, 그러면 전공이 천체물리학 내지는 심지어 천문학(블랙홀도 천체의 하나라는 상식 정도를 겸비한 분들) 아니냐며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래도 '입자'가 뭔지 보다는 '블랙홀'이 뭔지를 설명하는 편이 훨씬 간편하다.


그 다음으로 '큰' 걸림돌 없이 넘어가는 답은, 이론물리학이다. 아마도 뭔지 몰라도, '수리물리학'이란 말보다는 덜 위압적이라 그럴까? 아무튼 대응하여 실험물리학이란 걸 어렵지 않게도 떠올려볼 수도 있으니. 하지만, 이런 명명도 어떻게 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다. 과학이란 자고로 이론과 실험이 병행되어야 완성되는 법이고, (대체로!)근본적인 물리학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한 사람의 전공이 이론이냐 실험이냐로 극명하게 나뉘는 경우는 드물다. 즉, 이론 전공이냐, 실험 전공이냐를 구별해서 따지는 분야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또한, 적어도 입자물리학에서는, 거의 수리물리학적 언어를 구사하는 이론학자와 'engineering science'(정착된 한국말은 없는 듯하다)적 언어를 구사하는 실험학자 사이에는, 같은 입자물리학자끼리도 대화가 생각만큼 원활하지 않을 정도로 간극이 심하다. 더군다나 그 중간에 현상론(phenomenology)이라는 또 하나의 '전공'도 존재한다. 현상론학자라면, 굳이 표현하면, 이론과 실험 사이를 다리로 이어주는 통역자 또는 번역자 역할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전공 분야 하나를 소개할 때, 아직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왜 연구한다는 이야기는 거의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장황해진 까닭은, 학계의 문화와 역사가 그 발전상과 복합적으로 버무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까지 설명하자면, 연구 내용을 말하지 않고도 책 한 권 정도는 쉽게 나올 듯하다.


번역 이야기를 한다고 하고서는, 왜 이렇게 전공 이야기를 많이 꺼냈냐고?


번역이라는 세계가 절대 진리 같은 게 존재하지 않다 보니, 이후의 이야기는 모두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 경험에 의거한 터라, 번역과 관련된 일을 희망하는 분들께서는 참고하는 정도로 수용하시는 선이 적절하리라 판단한다. 특히, 어떤 교재나 교과서, 내지는 매뉴얼처럼 fact나 how-to를 콕콕 발라내기보다는 번역을 실제로 해본 경험을 자유롭고 유연하게 공유드리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터라, 다소 산만할지 몰라도, 그러한 경험담 속에서 번역이라는 일이 어떤 건지, 이를 하려면 어떤 마인드와 재주가 필요한지 등을 나름으로 유도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이런 방식을 택한 중요한 이유 하나는, 번역은 그 자체가 과학(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상당히 물리학스러운 작업)이기도 하지만, 아주 복잡다단하고 미묘한 art기도 해서다.


그럼, 번역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본지에서 '번역'이 무엇인지부터 명료히 밝히고 가야겠다. 이 역시 필자의 경험이 흐른 순서를 배경으로 곁들여 이야기하면 조금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으리라 본다.

아, 그 전에 일단, 한 가지 깔끔히 답하지 않은 게 있다. 앞에서 전공 이야기부터 장황하게 한 까닭은 두 가지다. 이 '왜'가 '왜'인지도 차츰차츰 풀어 가보겠다.


1. 번역에서 전공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기우에서 명시하면, 수리물리를 전공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2. 전공을 명명하는 여러 말들도 거의 모두(일본을 거친) '역어'고, 이를 이어 가는 스토리 안에 이미 번역의 일부 면면들이 숨어 있기 때문


가끔 생각해보건대, 아니 바라건대, 과학 커뮤니케이터를 넘어서 크리에이터를 아주 살짝은 꿈꿔보기도 한다. 특히 작업 중인 번역 경험을 발판으로 삼아 조금씩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꿈은 아닐까 하고. 하지만, 가능과 불가능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단정하는 건 극히 싫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번역만 하기에도 삶은 무지 짧은 듯해서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번역 역시 과학 커뮤니케이션이자 크리에이션의 일부기는 하다. 번역이 창작물이라는 시각은 여전히, 여러 맥락으로 그 자체로 쟁점이지만, 왜 타당한지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느끼시리라 기대해 본다. 맞물려서 번역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데는 그다지 이견은 없을 듯하다.

다음 글부터는 번역의 존재 이유와 방식부터, 개인적, 사회적 렌즈로 각각 조명해보면서 역자에게 필요한 정신적, 기술적, (굳이 구분하자면) 선/후천적 특징이 무엇인지 차차 생각해보자.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과학번역

+ 과학도 번역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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