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창조과학을 위한 변명 #2] 크리스천 과학자와 창조과학자

크프우프크(Kfwfk)
2023-02-14


[창조과학을 위한 변명 #2] 크리스천 과학자와 창조과학자


23세에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카이스트 설립을 주도했으며,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차례 역임한 정근모 박사는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걸 지나가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보게 된 책입니다. 참새는 방앗간을 지나치지 않는 법이죠.)


아... 아멘...[제목을 보고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믿음생활과 과학기술자로서의 생활 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과학기술의 영역은 더 높은 진리의 극히 한정된 일부분일 뿐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섭리를 더 깊이 깨닫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흔한 창조과학자의 신앙고백이네'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겠죠. 흠... 하지만 제가 정보를 찾아본 바로는 정근모 박사가 창조과학자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한동대학교 총장 재직 시절에 창조과학 관련 행사에 축사를 해주거나 창조과학 서적에 추천사를 써주는 등의 행적이 있지만(그마저도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 검색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으로는 정근모 박사가 창조과학의 핵심적인 두 가지 주장, 젊은 지구 창조론과 홍수지질학을 지지한다고 보기 어렵죠. (사실 정근모 박사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서 물어보는 게 가장 확실하겠네요. 왜 이 생각을 안 했지?)


정근모 박사가 창조과학을 지지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쨋거나 그가 신앙과 과학 중에서 신앙을 더 중요시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편의상 신앙을 과학보다 중요시하는 과학자들 중에서, 창조과학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을 '크리스천 과학자'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명칭은 우종학 교수가 쓴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라는 책을 참고했습니다.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크리스천 과학자의 입장이 궁금하다면 읽어볼 만합니다.)


크리스천 과학자는 단순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과학자'가 아닙니다. 크리스천 과학자들에게 신앙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들의 삶에서 종교는 항상 최우선 순위에 있는 것입니다. 과학자가 되고 연구활동을 하는 동기도, 연구 주제에 대한 영감도 모두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크리스천 과학자들에게 신의 말씀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입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크리스천 과학자와 창조과학자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피상적으로 볼 때 두 집단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진화론을 수용하느냐 마느냐 입니다. 창조과학자들은 진화론을 거부하지만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조과학자들은 종교적인 부류고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과학적인 부류라는 쪽으로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더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한쪽은 이성의 편이고 다른쪽은 미신과 종교의 편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크리스천 과학자와 창조과학자 양쪽 모두 '신의 말씀'을 절대적인 진리로 여깁니다. 그런데 '신의 말씀'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에서 차이가 발생합니다.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신의 말씀을 기록한 두 권의 책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는 성경이며 다른 하나는 '자연'입니다. 즉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자연을 탐구하는 것은 곧 신의 말씀을 탐구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창조과학자들도 '자연이라는 책'에 대해서 언급하지만 그들에게 어느 쪽에 비중을 두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성경이 더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 과학자들에게 성경과 자연은 동등한 비중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과학자들에게 두 권의 책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사고에 일종의 유연함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쪽 분야의 저술을 읽다보면 흔히 보는 것이 '창조과학자들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지만,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한다'는 식의 표현인데요.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함은, 제 생각에는 성경과 자연이라는 두 권의 책을 비교해서 양쪽을 조합한 세계관을 구축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창조과학자들에게는 단 한 권의 책밖에 없습니다. (농담이지만 "책을 단 한 권만 읽은 사람을 조심하라"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그것도 구멍이 숭숭 뚫린 삼류 판타지 설정집 같은 책이죠. (성경을 비하하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한 재료로 볼 때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옛 성현...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정확한 통계 자료를 본 적은 없지만, 크리스천 과학자와 창조과학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많을까 생각해봤을 때 크리스천 과학자가 더 많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 대중적 인지도가 큰지 따져보면 단연 창조과학자 쪽이죠. 오죽하면 크리스천 과학자인 우종학 교수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 과학자'라고 하면 창조과학자들만 떠올린다고 투덜거렸을까요.


재밌는 것은 두 집단이 서로 반대편을 '한국 개신교 쇠퇴의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박터지게 싸운다는 점입니다. 먼저 창조과학자들의 논리를 볼까요? 창조과학자들은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성경과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이론인 진화론과 타협했으며, 이러한 타협이 성경에 대한 믿음을 침식시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자연스럽게 성경에 대한 믿음이 옅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창조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근거를 내세웁니다.유럽의 개신교가 쇠락한 이유가 그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은 오랫동안 진화론의 공격(?)을 굳건하게 방어해왔지만, 곧 함락당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때문에 한국의 창조과학자들은 한국이 세계 개신교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창조과학자들은 갖가지 설문조사를 통해 진화론에 대한 믿음과 신앙의 굳건함이 반비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합니다. (별로 설득력은 없었습니다.)


반면에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교회에 만연하는 창조과학 지식들이 젊은 층의 교회 이탈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젊은 층이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지식과 창조과학 지식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고, 결국 교회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양쪽의 논리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두 효과가 모두 작용하고 있을 터인데... 어느 쪽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할지는 모르겠네요.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진화론과 성경이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 기술은 진화론이 들어설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하나님에 의한 창조를 확고하게 믿고 있지만, 창조의 과정이나 그 이후의 일은 성경이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진화론과 성경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에 대해서 (창조과학자들에 비해) 비교적 넓은 스펙트럼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최초의 세포를 창조했지만 이후의 진화는 모두 자연적인 과정이었다는 주장도 있고, 하나님이 진화의 과정을 하나하나 인도해서 인간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예 하나님의 역할을 태초의 빅뱅에만 한정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번외)편에서 다뤄보겠습니다. 


* 연재 글에 사실과 다른 점이 있거나 창조과학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댓글 또는 ojunjang@gmail.com으로 알려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크프우프크(Kfwfk): 공대를 졸업했고, 출판사에서 과학책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이상한 사람을 볼 때마다 다가가서 말을 거는 상상을 합니다.

#창조과학을위한변명

+ '창조과학을 위한 변명' 연재 목록 보기


ESC 진행 예정 행사 (참여하면 넓어지는 과학 이야기)

숲사이는 ESC에서 운영하는 과학기술인 커뮤니티입니다.
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공지 
(04779) 서울특별시 성동구 뚝섬로1나길 5, G601 (성수동1가, 헤이그라운드 성수 시작점) 

Copyright ⓒ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All rights reserved.    


운영진 게시판 


숲사이는 ESC에서 운영합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공지

(04768)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 115 G410 

Copyright ⓒ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All rights reserved.
운영진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