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과학자와 피아노 #1. 45년간 나를 매료시킨 피아노

블랙소스
2023-02-07


[과학자와 피아노 #1] 45년간 나를 매료시킨 피아노


수학과 물리학이 적나라하게, 더없이 실감나게 구현되는 채널 중 가장 매력적인 정체, 나에게 그것이란 바로 피아노다. 이것이 수리물리학 전공자인 내가 피아노를 거진 45년이란 세월에 걸쳐 놓지 못하는 이유의 핵심이라고 가정한다. 물론, 그런 매력을 45년 내내 느꼈다고 하면 (단적으로 말해 45년 전에는 '수학'이니 '물리학'이니 하는 단어를 알지 못할 뿐더러 가나다라 걸음마를 시작하던 시절이니) 거짓말이고 이는 어디까지나 그러한 일부의 실제 기간을 포함하더라도, 그저 사후적 해석이다. 참, 그런데, 아니, (피아노를) 못 놓는 게 아니라 밥벌이성 연구의 제약만 떠난다면 정말 죽고 못 살게 만들 만큼 미치는 게 바로 피아노다. 순수한 수학으로서, 순수한 과학으로서, 그리고 순수한 즐길 거리로서. 


무엇보다 투명하고 솔직하고 중립적이다. 연주자의 의도와 동작과 반응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받아내어 어떤 음악이라는 결정체의 사운드를 좋든 나쁘든 가감없이 그대로 만들어 우리 귀에 들어오게 한다. 그것이 피아노다. 물론 좋은 피아노일수록 더욱 정교하고 예민하게 그런 기능을 한다. 다만, 다른 악기를 잘 몰라서 피아노가 이런 면에서 최고라고 하는 건 객관성이 떨어질지도 모르겠지만, 단일 악기로서는 acoustics와 harmonics가 복잡다단하기로는 짝이 없을 터라, 완전히 감각의 오류에만 기인한 관점은 아님도 확신한다. 


소리를 내도록 지시한 정보의 집합체인 악보는, 그야말로 수학적 개념과 논리의 집합체나 다름없다. 곧 텍스트로서의 수학이다. 그러한 확고하고 일관된 체계를 통해서도 존재하는 어법 덕분에,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악성도 위업을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에 이르기도 한다. 이러한 추상적 기호와 수치를 피아노라는 프로세서가 다채로운 사운드로 변환해주는 기작은 아무리 곱씹어봐도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런 때, 바로 magic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법 아닐까. 피아노 연주 소리에 푹 빠져들어 있다 보면 마치 숲속에서 피아노를 만드는 데 쓰인 목재의 원 나무들이 제자리에서 향을 듬뿍 내며 노래를 하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자연스러움, 아니 자연 그 자체. 소리라는 현상이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있을까? 

 

좋다, 청각적 쾌감론은 이쯤에서 멈추고, 또 다른 감각은 어떻게 기능하는지 조금만 따져보자. 개인적으로는 피아노 블랙, 또는 흔히들 블랙 유광이나 영어 약어로 PE(Polished Ebony)라고 하는 이 색감(과 그것이 빚어내는 현상)이 좋아서도, 그리고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이 교차하는 색깔의 배열과 길이의 묘한 상대적 비율이 좋아서도 피아노에 끌린다. 뭐랄까, 곧 유채색이 거의 배제됨에 따른 역설적 미학의 깔끔함이 돋보이는 모양새가 무척 매력적이어서랄까. 


하지만 청각과 시각 외에, 피아노를 다루는 순간마다 맛보는 감각의 클라이맥스는 촉각에서 나오지 싶다. 손가락과 건반이 닿는 면적에 따라 달라지는 감촉, 건반을 누르는 속도나 강도에 따라 결이 달라지는 쫄깃함의 면면도 만만찮은 즐거움이지만, 건반이, 아니 피아노 전체가 내 몸의 일부와 같다는 일체감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 감각도 결국은 촉각이 아닌가. 연주 작품이나 악상에 따라서는 손등이나 심지어 주먹을 통해서도 피아노와 닿게 마련이니 촉각을 통한 악기와의 커뮤니케이션도 피아노를 ‘친다’고만 표현하기에는 무척 다층적이다. 


아무튼 피아노가 이모저모 좋으니 피아노 음악을 많이, 우선하여 접하기 마련이지만, 나아가서 피아노 소리만 들리는 작품이 어쩌다 뜻밖에도 지루하거나 단조로운 감이 문득 들기도 할 때는 다른 악기나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물론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한 편이다) 찾아 들으면서 새로움을 추구해 본다. 직접 찾거나, 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선곡 중 어떤 작품이나 연주가 색다름을 줄까 기대하면서 귀를 기울이면서 말이다. 그럼, 음악사를 통틀어,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수준의 눈이지만, 가장 위대한 작품을 꼽아 본다면 무엇이 순위에 오를 수 있을까? 독자들 마음 속엔 어떤 연주나 기악곡, 아니면 심지어는 어떤 노래라도 떠오르는지? 이어지는 편에선 그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어진다. 마치기 전 잠깐 힌트를 남기면, 위에 이야기한 흐름 속에서 짐작하기엔 무척이나 뜻밖일지 모르겠지만, 어떤 위대한 소나타나 협주곡, 교향곡과 같은 (흔히 일컫기를) 대작이라는 범주에 들지 않는, 오히려 어떤 영화 속 OST다. 어떤 영화인지 짐작은 좀 하시겠는가?


#과학자와피아노

- 다음 편에서 계속 -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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