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 ‘후성유전 변화’ 세살 건강이 여든까지 간다

최진희
2024-05-22


제2차세계대전 마지막 겨울, 나치는 네덜란드에 공급되던 연료와 식량을 모두 봉쇄했다. 1944년 1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이어진 이 봉쇄는 2만명 이상의 아사자를 발생시켰고, 임산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생존자들을 심각한 영양실조에 빠뜨렸다. 이 사건은 '네덜란드 대기근'으로 불린다. 네덜란드인들은 이 기간 동안의 사망 출생 질병 장애와 관련된 인구통계를 꼼꼼히 기록했다. 이 기록들은 ‘네덜란드 기근 코호트 연구(Dutch Famine Cohort Study)’라는 이름으로 공개됐다.

수십년에 걸쳐 이 그룹을 연구한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대기근 기간 임신 중이었던 산모에게서 태어난 아기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일반인보다 높은 비만율에 당뇨병 등 대사질환이나 정신질환 등에 걸릴 가능성이 높았다. 심각한 저체중으로 태어난 아이들도 많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영향이 이 아이들의 자녀들, 즉 영양실조를 겪은 여성들의 손자에게도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대기근은 태아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대기근을 겪었던 사람들도 장년기에 대사 장애와 심혈관계 질환 빈도가 높았다.


<삽화 김기명>


어린 시절 네덜란드 대기근을 겪은 생존자 중에는 20세기 최고의 스타인 오드리 햅번도 있었다. 그녀가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로마의 휴일’에서 보여준 우아하면서 섬세한 체형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녀의 아름다움이 대기근 동안 겪은 심한 고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사건이 끝난 것은 그녀가 16살이 될 때였지만 그 여파는 그녀의 평생 건강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빈혈과 호흡기 질환 등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네덜란드 대기근 연구가 밝힌 과학적 근거들

2008년 저명 과학저널인 PNAS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이 현상의 실마리를 밝힐 결과가 발표되었다. 대기근 생존자 가족들을 60년간 추적 조사한 이 연구에서 대기근 당시 임신 초기였던 산모들에게서 태어난 아기들은 성인이 된 후 다른 형제들에 비해 당뇨병 발병률이 높았고, 인슐린 대사에 관여하는 유전자(IGF2)의 발현이 훨씬 낮았다. 이 연구는 초기 발달 단계에서의 환경이 사람의 유전적 표현과 그에 따른 질병 발생에 평생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과학적으로 밝힌 최초의 사례다.

네덜란드 대기근과 관련한 역학 연구는 ‘건강 및 질병의 발달 기원(Developmental Origins of Health and Disease, DOHaD)’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DOHaD 이론은 성인기에 나타나는 건강과 질병 패턴이 태아기와 유아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개념이다.

DOHaD 이론의 핵심은 발달의 중요한 시기, 특히 태아기와 초기 유아기 동안 우리 몸이 외부 및 내부 환경에 특별히 민감하다는 것이다. DOHaD의 핵심은 후성유전, 즉 우리의 행동과 환경이 유전자의 작동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화를 일으킨다는 개념이다. 후성유전 변화는 DNA 염기서열을 변화시키지 않고 세포가 유전자를 읽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이는 우리의 생활 방식과 환경이 생각보다 훨씬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질병에 대한 위험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 시절 환경요인으로 인한 후성유전 변화는 유해한 화학물질의 노출로도 발생할 수 있다. 2006년 연구에 따르면 1950년대 비소로 식수가 오염된 칠레의 도시에서 유아기를 보낸 사람은 30~40대가 되었을 때 폐암과 기관지확장증 등으로 인한 사망률이 크게 증가했다. 1955년 일본에서 비소로 오염된 분유에 노출된 수천명의 유아 집단을 장기간 추적 관찰한 연구에서는 백혈병과 피부암 간암 췌장암 발병률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미국의 한 코호트 연구에 따르면 드라이클리닝에 널리 사용되는 테트라클로로에틸렌(PCE)에 오염된 식수를 섭취한 어린이들에게서 조울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게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을 체계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현재 전세계적으로 많은 어린이 코호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유럽연합(EU) 아동 코호트 네트워크, 아시아 출생 코호트 컨소시엄 등 국제 네트워크가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환경부에서 어린이 환경보건 출생 코호트를 운영하고 있다. 2015년부터 7만명의 임산부를 모집해 환경 유해물질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태아 시기부터 청소년기에 이르는 2035년까지 20년 이상 주기적으로 추적 관찰하는 연구다. 환경부에서는 이 코호트 연구를 통해 태아 및 유아기의 유해물질 노출과 알레르기 질환, 성장 발육 및 내분비계, 신경 인지 발달, 사회성 및 정서 발달 간의 상관성을 연구해, 이를 기반으로 어린이 환경보건 정책을 만들어 갈 예정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잘 자랄 환경 마련에 더 노력해야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저출산 대책뿐 만이 아니다. 태어난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깨끗한 환경을 마련하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제 과학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DOHaD 이론을 바탕으로 태아와 유년기의 유해 화학물질 노출이 성인기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미래세대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건강 영향을 파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효율적인 유해 화학물질 예방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진희 (서울시립대 교수 환경독성학)

내일신문과 ESC가 함께 과학칼럼 코너를 신설해 2023년 새해부터 매주 화요일 '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갑니다. ESC 회원 과학자 칼럼니스트들의 맛깔난 '우리를 둘러싼 과학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기사원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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