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과학자와 피아노 #12. 새해를 열기에 가장 적당한 곡은? - Trilogy Part I

블랙소스
2024-02-15


정말로 신년이 된 기분은 늘 설은 지나야 드는 법이라 맞물리는 생각 하나, '달력이니 절기니 하는 건 얼마나 인위적인지, 그저 사람이 만든 기준에 불과한 노릇 아닐까'. 아무튼 의미 부여의 관행을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겠으니 한 해를 출발하는 첫 글로는 그렇게 많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단연코 1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무엇인가 중에서 고르고 싶어진다. 게다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올해를 상징하는 파란 색의 시원함은, 아무 샤프(sharp)도 플랫(flat)도 달리지 않은 홀가분한 C(다)장조와도 잘 어울리지 싶다.

C는 또한 우리가 음악을 떠올릴 때 시작하는 계이름인 "도" 아닌가, 그래서 시작과도 잘 어울리는 조일까? 아마 적어도 앞에서 인물 탐구 대상으로 처음이자 (아직은) 유일하게 등장한 쇼팽이라면, "아니"라고 답할 확률이 크다고 본다. 실제로 연주를 하는 측면에서는, 아무 올림이나 내림이 없기에 악보 읽기 만큼은 쉽다고 느낄지 몰라도 건반 위에서 연주를 직접 맡아야 하는 손의 구조(와 건반 배치의 상호작용)에 비추어 보면 그렇게 친해지고 싶은 조성은 아니다. 부연하면, 손가락은 1번(엄지)과 5번(새끼)이 짧고, 건반은 백건보다 흑건이 짧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가장 자연스럽게 반영한 레이아웃은 2, 3, 4번 손가락이 나란히 검은 건반 위로, 1과 5번 손가락은 하얀 건반 위로 가는 위치다. 이렇게 볼 때, 검은 건반을 전혀 안 쓰는 C장조 스케일을 6음 이상 진행하려면 엄지가 다른 손가락 밑에 위치하는 (다른 손가락이 엄지를 축으로 회전하거나 그 위로 넘나드는) 순간을 거칠 수밖에 없으므로 그렇게 달갑지는 않다. 스케일도 그러하지만, 아르페지오 역시 정도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비슷한 의미에서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래서 쇼팽은 손에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조성으로 E장조를 꼽았다. E장조의 "도레미파솔"이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그 위치와 일치하므로.

그렇다면 C장조란 게, 이처럼 까칠하기도 어색하기도 하니, 처음 배울 조성으로 받아들이기 정녕 어려울까? 어떻게 보면, 과장을 조금 보태어, C 장조의 다양한 음형 진행을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으면 다른 조인 경우는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쉽게 섭렵하리라! 이에, 역설적으로 C장조는 역시 제일 기본이고 출발점이어야 마땅할까? ^^

오랜 세월 건반 앞에서 지내 온 경험에만 의거한 느낌으로는 C장조가 "시작"과 정말 어울리는 까닭은 마치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와 같아서다. 그만큼 무한한 색채감과 즉흥성을 내포하는 조성이다. (하얀 건반만 쓰는 영향이라고 해석할 여지도 있지만, 흑/백의 색이 뒤바뀐 건반도 존재하므로 그건 반례가 버티는 덜 깔끔한 해석이다. 게다가 C장조라고 해서, 정의가 그러할 뿐, 하얀 건반만 필요한 법도 아니다.)

C장조가 얼마나 변화무쌍한 표정을 지니는지가 제대로 드러나는 실제 작품을 하나 꼽자면, 단연 쇼팽의 연습곡 작품 10-1(etude op. 10-1)이다. 특히, "시작"이라는 개념으로 볼 때는, 피아노 곡의 다양한 장르가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연습곡이 1순위 후보로 적절하지 않을까 하여, 쇼팽 연습곡의 첫 곡을 낙점했다. 혹자는 전주곡이 연습곡보다 먼저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연습"하지 않고서는 전주곡이고 어떤 곡이고 연주할 수 없다. 일명 "초견" 또한 광의의 연습의 일부다. 이보다 방어가 어려운 반론은 사실, 쇼팽 정도 작곡가의 작품이라면 연주회 무대에도 올리고 음반도 녹음하고 하는 수준급 예술인데 '연습을 위한' 곡이라고 할 수 있냐, 그러니까 그런 연습곡이 연습용이라면, 역으로, 다른 작품들은 연습용이 아니겠냐고 하는 역공이다. 연습곡이라는 장르의 탐구에 본격적으로 들어가야 이에 대한 방어든 공격이든 적절해질 테니 오늘의 주제를 너무 벗어나므로 이는 적당한 다음으로 미루고, 아무튼 이 곡은 쇼팽이 작곡한 총 24개(op. 10의 12개, op. 25의 12개, 유작 포함 시에는 27개) 연습곡의 포문을 여는 작품이기도 하다.

단, 여기서 잠깐 하나 더 짚고 넘어가면, 연습곡+C장조+1번의 조합이 쇼팽에게만 해당되는 논리적으로 배타적인, 썩 그렇게 고유한 귀결은 아니다. 그러면 쇼팽의 연습곡이어서 특별한 이유는? 센스가 뛰어난 독자께서는 직감하시겠지만, 쇼팽 연습곡이 연습곡 아닌 연습곡일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둥의 교과서적 이야기보다는(간간 강조하지만 단순 검색 가능 정보는 지양), 앞선 인물 탐구에서 보았듯이(엄격히 표현하면 '주장'했듯이) 그 입자물리학적 개성 때문이다!

본 이야기의 검색 가능 정보 최소화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흐름상 불가피하게 언급해야 할 사실도 있는 법. 이 작품의 여러 특징 중 입자물리학을 연상케 하는 일부 측면만 잠깐 살펴보자. 기우에서 먼저 이쯤에 한 마디 덧붙이면, 입자물리학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바탕을 하나 꼽자면 (환원적) 경제성인데, 개인적으로 유독 쇼팽의 스타일이 이러한 면에서 두드러진다는 상대적 차이를 강조하는 맥락이지, 다른 (위대한) 작곡가들에게서 그런 면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쇼팽 연습곡의 이 첫 곡은 한마디로 아르페지오의 향연이다. 그렇다고 평범하거나 극단적으로 정직한 하농식 아르페지오는 아니다. 관례적으로 아르페지오의 기본꼴이라고 하면 한 옥타브(8도) 내에서 네 음을 펼쳐(sequential) 연주하는 진행을 말한다. 즉, 상행 방향으로 '도-미-솔-도', 하행 방향으로 '도-솔-미-도'인 식이다. 하지만, 쇼팽의 작품 10-1에서는 이 기본 단위가 8도가 아니라 10도다(대체로 대부분의 마디에서, 즉 골격이 그렇다는 말이고, 이 간격 또한 변화무쌍하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C장조를 토대로 하는 까다로움에 더하여, 이렇게 음들 간격이 넓어졌으니, 곡이 더욱 어려워진다. 연주자나 학습자에 따른 개별 차이로 인해 어디까지나 참고용이지만 원전판(urtext) 출판의 대명사인 헨레(G. Henle Verlag)에서 악보를 출간하는 작품마다 난이도를 책정한 기준에 따르면 가장 어려운 수준인 9다(27개 연습곡의 범위는 6~9 사이다.).

이 곡을 들으면 장대하고 화려한 느낌이 일착으로 들기 마련인 데다 음들이 뛰어다니는 폭이 크니, 무의식적으로 연주할 때 동작이 커지기 마련인데 초보자들이 무심코 하기 쉬운 실수다. 실제로 연주자들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게 보이기도 하는 듯하지만 의외로 들리는 소리의 움직임에 비하면 물리적 움직임은 오히려 약한 편이라 해야겠다. 최대한의 경제성이 연주법상으로도 요구되는 곡이라는 뜻이다(물론 모든 연주의 기본이 릴랙스를 전제로 한 경제성을 추구한다. 다만, 특별히 이 곡에서 이 점이 강조되는 이유는, 불필요한 동작을 유발하기 쉬운 요인들이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작품보다도 손가락 움직임의 세밀함과 중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감각이 절실한 절묘한 수작이다(단순 난이도의 비교 측면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에서는 불공평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이, 큰 손에 특히나 유리한 곡이다(그렇다고 작은 손이라고 도전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일명 TMI일지 몰라도, 이런 일부 이유에서, 그리고 위에서 C장조의 까다로움을 살짝 비쳤으므로, 이 곡이 1번이라고 해서 쇼팽 연습곡을 공부할 때 덥석 여기서 시작하는 선택은 무리수이기 십상이라는 함의도 밝혀둔다.

물리적 움직임에서 요구되는 외형적 경제성 외에 작품 안으로 들어가서 그러한 환원성을 따져보자면, 왼손은 옥타브 진행, 오른손은 음들 하나하나의 진행만으로 끝까지 가는, 어쩌면 연습곡이기에 가능한 특징일지도 모르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형식적으로는 무척 단순하다. 하지만 이러한 단음의 조합만으로도 어찌나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성과 풍부함을 표출하는지,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 단위인 쿼크(quark)와 렙톤(lepton)이라는 페르미온(fermion)들이 글루온(gluon)이니 W/Z 입자니 광자(photon)니 하는 보손(boson)들과 어우러져 다양한 원자와 분자, 나아가서 우리가 관찰하는 물질(물리학적, 화학적, 생물학적, 천문학적) 세계이자 삼라만상을 전개하는 양상을 무척 닮았다.

소리의 이러한 화려함은 청각적임에도, 시각적 색채감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필자가 잘 모르는 분야지만 이러한 다른 감각 간의 연결고리가 신경과학이나 뇌과학에서는 어떻게 설명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니면 심리학적 비중이 더 높을까? 때로는 음악을 듣다 보면 시각만이 아니라 미각이나 후각까지도 자극되는 느낌마저 드니까(단순한 착각이라기에는 이래저래 무리가 있다.). 이야기가 너무 옆길로 빠져나가기 전에 그러면 이쯤에서, 신년을 열기에 (여러 모로) 좋다는 이 작품을, 백'독'이 불여일'청'이라 실제로 한번 손과 팔의 움직임을 (얼마나 경제적인지) 보시고 사운드도 들어보시고 하자. 당연히 이 곡의 역대급 명연(국제대회의 1차 예선임에도)으로 꼽을 수 있는 영상을 공유드린다. 그러고 나서 뒷이야기를 곡 전체의 악보(영상 속)와 함께 이어 가려 한다.

PS:
이 곡을 이 시점에, 신년을 핑계(?)로 다루는 정말 솔직한 중요한 이유는 필자가 무대에 올려본 극히 드문 곡 중 하나기 때문에, 그래서 그만큼 연습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곡이기도 하고, 시기나 절기를 떠나 그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해서다. 앞선 어떤 꼭지의 글에서 예고했듯이, 이 연습기를 통해 계산력을 포함한 과학적 사고력이 어떻게 요구되고 펼쳐지는지를 공개할 때가 된 듯하여서도 그 스타터나 애피타이저 격으로 작품 소개를 꺼낸 셈이기도 하다.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과학자와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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