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이하 ESC)의 젠더다양성위원회와 대전에서 과학을 테마로 운영 중인 카페인 과학카페 쿠아(QUA)가 콜라보레이션으로 주최한 행사인 영화의 밤 <마리 퀴리(Radioactivity, 2019)> 함께 보기 행사에 다녀왔다. 마리 퀴리라는 상징적인 여성 과학자의 팬이기도 하고, 그를 소재로 만들어진 여러 콘텐츠를 몹시도 애정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작게나마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남겨보려 한다.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먼저 말해둘 것이 있다. 나는 이 뒤로 대부분 마리 퀴리를 '퀴리부인'으로 호칭하는 대신 그의 프랑스식 이름인 '마리'만으로 호칭하려 한다. 이것은 남편의 성을 따라간 아내로서 그의 모습을 그리기보다는 그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자 함이며, 생애 내내 스스로 한 사람의 오롯한 학자로 존재하고자 했던 나의 푸른 별에게 보내는 작은 경의의 표시이다.
'나는 인류가 새로운 발견을 통해 악보다는 선을 끌어낼 것이라고 믿는다.'
1905년, 스톡홀름 과학아카데미에서의 연설을 마무리하는 피에르 퀴리의 마지막 한마디이자 영화에서 피에르 퀴리가 노벨 물리학상 시상식 무대에서 하는 연설의 한마디는 퍽 낭만적이고 희망적이지 않은가. 이는 인류의 선을 믿음으로써 나오는 시대의 낭만이자 올곧았던 두 과학자의 낭만이기도 할 것이다. 이 영화는 마리 퀴리를 다루는 대부분의 콘텐츠와 마찬가지로 그의 차녀인 이브 퀴리가 저술한 전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로자먼드 파이크가 분한 마리는 언뜻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과학자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표현하는 마리는 오히려 격정적이다. 언니와 마주 보며 웃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솔직하게 발언하며, 연인에게 먼저 입을 맞추고 부당한 대우에는 불같이 분노하고, 남편의 죽음 앞에서는 애달프게 울부짖는다. 더하여 폴 랑주뱅과의 불륜 스캔들까지 이 영화는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대외적으로 비추어지는 철의 여인이라는 영웅적 이미지와 더욱 대비를 이루며 마리를 입체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본래 제목인 '방사능(Radioactivity)'처럼 영화는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구조를 취한다. 영화는 죽음을 앞둔 마리 퀴리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의 인생을 대변하는 듯한 실험실에서 쓰러진 마리는 피에르 퀴리와의 첫 만남을 회상한다. 마리가 떨어트린 책을 피에르가 주워주는 것으로 그와 그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라듐이 항암 치료에 이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된 후에는 영화 중간중간에 단편적 사건들이 삽입된다. 방사선 암 치료용 선형가속기, 히로시마 원자폭탄, 트리니티 실험, 체르노빌 원전 사고까지 마리의 사후에도 계속해서 퍼져 나가는 라듐의 나비효과는 관객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노벨상 시상식에서 피에르가 말하듯 '자연의 비밀을 아는 것이 과연 인류에게 득이 되는가?', '그 혜택을 누릴 준비가 됐는가?' 공교롭게도 해당 장면 사이마다 영화는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는 모습을 함께 보여준다. 두 사람의 낭만과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조각조각 삽입되는 원자 폭탄의 투하 장면은 최고이자 최악의 대비를 만들어 내며 역설적으로 인류의 선함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더욱 굳건한 당위성을 부여한다.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선을 믿고 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영화는 고증을 상당히 충실하게 반영하면서도 몇몇 군데에서는 의도적으로 현실을 비틀고 있다. 그때의 당신들은 마리 퀴리라는 과학자를 그렇게 규정해서는 안 되었다고 이야기하듯이 말이다.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라듐 발견 이후 찍힌 한 장의 사진이다. 영화에서는 피에르가 마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고 마리는 라듐이 든 작은 유리병을 바라보는 구도의 사진. 이 사진은 두 사람이 언론에 노출되는 시작이며 '르 쁘띠 파리지앵(Le Petit Parisien)'이라는 신문에 실리게 된다. 이 사진의 모티프는 명백하게 1904년 12월 22일 자 배니티페어(Vanity Pair)라는 미국 잡지에 실린 캐리커처로 보인다. 영화와 옷도 구도도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만이 반대이다. 실제 지면에서는 시험관을 든 것이 마리가 아닌 피에르라는 것. 빛나는 작은 유리병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업적은 영화를 통해 마땅히 가장 처음 호명되었어야 할 이의 손에 비로소 쥐어진다.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수많은 기사를 보여주는 내내 들려오는 박수 소리는 '이것은 응당 백 년도 더 전에, 바로 그때 받아야 했을 칭송이라고' 관객의 귀에 속삭이는 것만 같지 않은가.
@ (좌) File:Pierre and Marie Curie Vanity Fair 1904-12-22.jpg - Wikimedia Commons, (우) 영화 마리 퀴리 - 스틸컷
다양한 배경음악도 이 영화의 묘미 중 하나다.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동심원을 그리듯 반복되는 낮은음이다. 심장의 고동 소리나 어떤 신호처럼 들리는 단순하고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낮은음 사이로 상황마다 서로 다른 멜로디나 전자음이 불규칙하게 삽입된다. 당시 누구도 알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이었던 원자 내부의 세계를, 나아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표현하듯 말이다. 또한 영화의 초반부에 마리의 대학 시절과 자취방을 그린 장면에서는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제13악장인 '백조'가 공간 전체를 감싼다. 왜 하고많은 동물 중에 하필 백조를 선택했을까? 추측하건대, 제작진은 이브 퀴리의 전기에서 마리 본인이 회상하듯,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인간 사명의 최고봉에 가장 가깝고 가장 완전한 시절이었던 때'를 백조의 모습에 빗대고자 이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는가 싶다.
치열하고 참혹하며 절대 고결하지만은 않은 야전병원에서 마리의 회상은 끝이 난다. 도망치듯 병원을 나온 마리는 자신이 만든 나비효과들과 마주한다. 모든 파장이 희망적이지는 않으나 결국 마리도 피에르도 인간의 악보다는 선을 믿고, 온전히 확신하지는 못해도 선이 인류를 이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끊임없이 기대한다. 영화 말미에서 피에르가 마리에게 말하듯 말이다.
'공포와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보단 빛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는 게 좋잖아.'
나는 이것이 두 사람이 품었던 낭만 중 하나이리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이기적인 것이 좋아 보이고 이타적인 것은 바보 같아 보일 때가 있다. 많은 경우에 악은 강하고 선은 약해 보인다. 그러나 잔잔한 수면에 생긴 물결이 퍼지듯 고요한 세상에 던져진 선의 또한 조용하지만 강하게 퍼져 나갈 테다. 그들의 낭만은 100년 남짓 지난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세상은 과연 선한가? 수많은 역사적 과오와 지속되고 있는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인류가 악보다는 선을 끌어낼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들이 그랬듯이.
@ 영화 마리 퀴리
6월 3일,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이하 ESC)의 젠더다양성위원회와 대전에서 과학을 테마로 운영 중인 카페인 과학카페 쿠아(QUA)가 콜라보레이션으로 주최한 행사인 영화의 밤 <마리 퀴리(Radioactivity, 2019)> 함께 보기 행사에 다녀왔다. 마리 퀴리라는 상징적인 여성 과학자의 팬이기도 하고, 그를 소재로 만들어진 여러 콘텐츠를 몹시도 애정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작게나마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남겨보려 한다.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먼저 말해둘 것이 있다. 나는 이 뒤로 대부분 마리 퀴리를 '퀴리부인'으로 호칭하는 대신 그의 프랑스식 이름인 '마리'만으로 호칭하려 한다. 이것은 남편의 성을 따라간 아내로서 그의 모습을 그리기보다는 그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자 함이며, 생애 내내 스스로 한 사람의 오롯한 학자로 존재하고자 했던 나의 푸른 별에게 보내는 작은 경의의 표시이다.
1905년, 스톡홀름 과학아카데미에서의 연설을 마무리하는 피에르 퀴리의 마지막 한마디이자 영화에서 피에르 퀴리가 노벨 물리학상 시상식 무대에서 하는 연설의 한마디는 퍽 낭만적이고 희망적이지 않은가. 이는 인류의 선을 믿음으로써 나오는 시대의 낭만이자 올곧았던 두 과학자의 낭만이기도 할 것이다. 이 영화는 마리 퀴리를 다루는 대부분의 콘텐츠와 마찬가지로 그의 차녀인 이브 퀴리가 저술한 전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로자먼드 파이크가 분한 마리는 언뜻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과학자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표현하는 마리는 오히려 격정적이다. 언니와 마주 보며 웃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솔직하게 발언하며, 연인에게 먼저 입을 맞추고 부당한 대우에는 불같이 분노하고, 남편의 죽음 앞에서는 애달프게 울부짖는다. 더하여 폴 랑주뱅과의 불륜 스캔들까지 이 영화는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대외적으로 비추어지는 철의 여인이라는 영웅적 이미지와 더욱 대비를 이루며 마리를 입체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본래 제목인 '방사능(Radioactivity)'처럼 영화는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구조를 취한다. 영화는 죽음을 앞둔 마리 퀴리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의 인생을 대변하는 듯한 실험실에서 쓰러진 마리는 피에르 퀴리와의 첫 만남을 회상한다. 마리가 떨어트린 책을 피에르가 주워주는 것으로 그와 그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라듐이 항암 치료에 이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된 후에는 영화 중간중간에 단편적 사건들이 삽입된다. 방사선 암 치료용 선형가속기, 히로시마 원자폭탄, 트리니티 실험, 체르노빌 원전 사고까지 마리의 사후에도 계속해서 퍼져 나가는 라듐의 나비효과는 관객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노벨상 시상식에서 피에르가 말하듯 '자연의 비밀을 아는 것이 과연 인류에게 득이 되는가?', '그 혜택을 누릴 준비가 됐는가?' 공교롭게도 해당 장면 사이마다 영화는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는 모습을 함께 보여준다. 두 사람의 낭만과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조각조각 삽입되는 원자 폭탄의 투하 장면은 최고이자 최악의 대비를 만들어 내며 역설적으로 인류의 선함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더욱 굳건한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선을 믿고 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영화는 고증을 상당히 충실하게 반영하면서도 몇몇 군데에서는 의도적으로 현실을 비틀고 있다. 그때의 당신들은 마리 퀴리라는 과학자를 그렇게 규정해서는 안 되었다고 이야기하듯이 말이다.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라듐 발견 이후 찍힌 한 장의 사진이다. 영화에서는 피에르가 마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고 마리는 라듐이 든 작은 유리병을 바라보는 구도의 사진. 이 사진은 두 사람이 언론에 노출되는 시작이며 '르 쁘띠 파리지앵(Le Petit Parisien)'이라는 신문에 실리게 된다. 이 사진의 모티프는 명백하게 1904년 12월 22일 자 배니티페어(Vanity Pair)라는 미국 잡지에 실린 캐리커처로 보인다. 영화와 옷도 구도도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만이 반대이다. 실제 지면에서는 시험관을 든 것이 마리가 아닌 피에르라는 것. 빛나는 작은 유리병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업적은 영화를 통해 마땅히 가장 처음 호명되었어야 할 이의 손에 비로소 쥐어진다.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수많은 기사를 보여주는 내내 들려오는 박수 소리는 '이것은 응당 백 년도 더 전에, 바로 그때 받아야 했을 칭송이라고' 관객의 귀에 속삭이는 것만 같지 않은가.
다양한 배경음악도 이 영화의 묘미 중 하나다.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동심원을 그리듯 반복되는 낮은음이다. 심장의 고동 소리나 어떤 신호처럼 들리는 단순하고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낮은음 사이로 상황마다 서로 다른 멜로디나 전자음이 불규칙하게 삽입된다. 당시 누구도 알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이었던 원자 내부의 세계를, 나아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표현하듯 말이다. 또한 영화의 초반부에 마리의 대학 시절과 자취방을 그린 장면에서는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제13악장인 '백조'가 공간 전체를 감싼다. 왜 하고많은 동물 중에 하필 백조를 선택했을까? 추측하건대, 제작진은 이브 퀴리의 전기에서 마리 본인이 회상하듯,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인간 사명의 최고봉에 가장 가깝고 가장 완전한 시절이었던 때'를 백조의 모습에 빗대고자 이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는가 싶다.
치열하고 참혹하며 절대 고결하지만은 않은 야전병원에서 마리의 회상은 끝이 난다. 도망치듯 병원을 나온 마리는 자신이 만든 나비효과들과 마주한다. 모든 파장이 희망적이지는 않으나 결국 마리도 피에르도 인간의 악보다는 선을 믿고, 온전히 확신하지는 못해도 선이 인류를 이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끊임없이 기대한다. 영화 말미에서 피에르가 마리에게 말하듯 말이다.
나는 이것이 두 사람이 품었던 낭만 중 하나이리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이기적인 것이 좋아 보이고 이타적인 것은 바보 같아 보일 때가 있다. 많은 경우에 악은 강하고 선은 약해 보인다. 그러나 잔잔한 수면에 생긴 물결이 퍼지듯 고요한 세상에 던져진 선의 또한 조용하지만 강하게 퍼져 나갈 테다. 그들의 낭만은 100년 남짓 지난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세상은 과연 선한가? 수많은 역사적 과오와 지속되고 있는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인류가 악보다는 선을 끌어낼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들이 그랬듯이.
참고 자료
박윤지
과학커뮤니케이터. 활자 너머, 그 곳에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로 과학을 말하고 씁니다.
https://118elements.postyp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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