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 화학물질 관리에는 유죄추정의 원칙이 필요하다

최진희
2023-05-30


@삽화 김기명


2015년 8월 뉴욕타임스에 ‘20세기 미국 여성영웅이 10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기사가 실렸다. 이 ‘20세기 미국 여성영웅’은 누구일까? 바로 미국식품의약국(FDA)의 프랜시스 켈시 (Frances Kelsey) 박사다.


이야기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켈시 박사는 1960년 FDA에서 신약 허가 신청서를 평가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해 9월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첫 신청서가 바로 ‘탈리도마이드’였다. 1953년 독일에서 개발된 이 약은 임산부의 입덧방지제로 유럽에서 널리 팔리고 있었다. 이미 유럽에서 시판되는 약품인 만큼 미국 내 허가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켈시 박사는 도장을 찍어주는 대신 제조사에 약품의 독성에 대한 추가 정보를 요구하며 신청서를 돌려보냈다.


허가는 떼어 놓은 당상으로 여기고 이미 창고에 탈리도마이드를 가득 비축해두었던 제조사는 FDA에 전방위 로비를 펼치며 켈시 박사를 압박했다. 켈시 박사가 이러한 압박에도 꿈쩍하지 않는 사이 이듬해 유럽에서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아 출산을 유발한다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 약품은 곧바로 전면 회수됐지만 그때까지 임산부의 탈리도마이드 복용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팔, 다리가 없는 기형아가 1만명이 태어났다. 역사상 최악의 독성사고인 ‘탈리도마이드 비극 (Thalidomyde tragedy)’이다.


켈시 박사가 시판 허가를 내주지 않은 덕에 미국은 무사할 수 있었고 그녀는 미국의 영웅이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약품 허가 제도는 한층 강화되며 현대적인 의약품 규제가 정착하게 되었다.


화학물질 뒷북관리 패턴은 지금도 계속 돼


그렇다면 일상생활 속 화학물질의 안전성은 어떻게 관리되고 있을까? 불행히도 한국에서도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라 불릴만한 대형 독성 사고가 일어났다. ‘가습기살균제 사고’가 그것이다. 가습기살균제는 1990년대 후반부터 판매되고 널리 사용되었다. 그후 수년 동안 폐질환이 발생했는데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역학조사와 독성평가를 통해 가습기살균제가 치명적인 폐질환의 원인 물질이었다는 것이 2011년에 이르러서야 밝혀졌다. 10년 이상 사용된 후 드러나게 된 가습기살균제 사고는 그동안 우리 일상생활 속 화학물질이 어떻게 관리되어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예는 역사 속에 많다. 건축자재로 무려 70여년 동안 사용된 석면은 폐암과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독성 연구가 시작되었고, 그 후로도 30년이 지난 후에야 사용금지 제한과 같은 규제가 시작됐다. 다이옥신이나 DDT와 같이 환경에 오래 잔류해서 생물에 농축되어 오랜 기간 동안 독성을 나타내는 물질들도 수십년 동안 아무런 규제없이 사용되고 배출되어 왔다. 그러다 독성의 증거들이 드러나자 그제야 생산과 사용을 금지하는 규제가 국가별로 시작되었고 2001년에 ‘스톡홀름 협약’이 채택되어 국제적으로 규제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화학물질은 ‘개발-사용-피해-독성규명-규제’ 이런 식의 패턴으로 사용되어 왔다. 각 단계별로 넘어가는 기간은 제각각이지만 ‘뒷북관리’식 패턴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산업공정 및 생활 용도로 널리 사용되어 온 과불화합물(PFOS) 계열 화학물질은 잔류성과 독성의 증거들이 드러나면서 이제야 규제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환경유해가 나타난 후 대처하는 이런 사후 관리 방식으로는 우리가 화학물질 사용으로 인해 누리는 혜택은 지속가능할 수 없다.


형사 절차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지켜져야 하지만, 화학물질 관리에서는 유죄추정의 원칙이 필요하다. 즉 우리가 어떤 화학물질의 안전성에 대해서 잘 모를 때, 안전성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그 화학물질을 유해한 것으로 간주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전예방적 원칙 아래 화학규제는 점점 강화되고 있다. 2007년 유럽연합에서는 ‘리치(REACH)’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장 강력한 화학물질의 규제법이 발효되었다. REACH법 발효로 유럽에서 기업은 제품을 시장에 내놓기 전에, 그 제품이나 제품 안에 포함되어 있는 화학물질의 독성 정보를 유럽 화학물질청에 제출해야 된다.


‘노 데이터, 노 마켓 시대’ 도래로 규제 강화


이제 화학물질 분야에 ‘노 데이터, 노 마켓(No Data, No Market)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EU REACH를 시작으로 사전예방적 화학물질 규제가 전세계적으로 강화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화합물질 가 및 등록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화학제품안전법 등 일명 화학3법이 시행되며, 사전예방적 화학물질 안전관리 제도가 정착되고 있다.


이에 대해 기업은 이전에 없었던 각종 비용 부담 및 복잡한 규제로 기업활동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착을 위해서는 사회 전체적으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탈리도마이드 사고를 막을 수 있었던 켈시박사의 현명한 선택은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최진희 (서울시립대 교수 환경독성학)

내일신문과 ESC가 함께 과학칼럼 코너를 신설해 2023년 새해부터 매주 화요일 '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갑니다. ESC 회원 과학자 칼럼니스트들의 맛깔난 '우리를 둘러싼 과학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기사원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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