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tGPT가 하도 유명해서 관련된 자료나 책을 보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짧은 글을 써보려고 한다. GPT 엔진을 알게 된 때부터 잠깐 얘기를 하고 가야겠다. GPT1 엔진이 처음 나온 건 2018년이다. 이후로 업그레이드를 통해 GPT3 엔진이 나온 건 2020년이다. 물론 인공지능의 역사를 보면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성과이긴 하지만 최근 몇 달간 ChatGPT가 보여준 발전 속도만큼 빠른 건 아니었다. GPT 엔진을 알게 된 건 GPT3 때였는데 사실 이 때도 그리 크게 관심을 갖진 않았다. 두 번의 암흑기를 거치면서도 계속 새로운 서비스는 나왔고, 알파고 이후에 AI 분야는 그야말로 호황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문난 잔치에 먹을게 없는 것처럼 딱히 특별하다 싶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GPT3가 출시 되었을 때는 챗봇도 아니었고 UI(User Interface)라고 할 것도 딱히 없어서 아주 엔지니어적인 화면(하얀 바탕, 까만 글씨)으로 테스트 해 본 정도였다. 이후에 이미지 생성 AI인 DALL-E가 나왔으나 이 분야에 관심이 적다 보니 이 또한 호기심에서 몇 번 해보고 말았다. 이후에 GPT3.5를 기반으로 ChatGPT가 나왔을 때도 별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보게 된 기사로부터 ChatGPT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최초의 기사는 어디였는지 아쉽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사는 ‘Michelle Huang’이라는 분이 ChatGPT에게 본인의 어린 시절 일기장을 학습시킨 내용이었다. 이분은 트위터를 통해 대화를 공개했고, 나는 일일이 영어로 된 트윗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는지는 의문이지만, ChatGPT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Michelle Huang은 자신이 어렸을 때 썼던 일기장으로 ChatGPT를 학습시켰다. 그렇다면 ChatGPT는 무엇이 될까? 바로 어린 시절의 Michelle huang이 된다. 그리고 ‘현재의 나’는 ChatGPT를 통해 어린 시절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 이 과정과 내용은 트위터에 상세히 올라가 있다(링크). 누구나 생각해봤던 일이 아니었을까? 아니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제는 많이 잊혀져 어렴풋하게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나와 이야기해 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가끔 해봤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을 학습한 ChatGPT가 실제화된 개인도 아닌데 너무나 사람처럼 대답 하는 터라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묘하게 몰입이 된다. 이 사례로부터 ChatGPT에 대해 급격하게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때는 단지 기술이 궁금했고 이 ‘어린 시절의 나와의 대화’가 왜 그렇게 크게 끌렸는지에 대해 내 스스로도 잘 몰랐던 것 같다.
최근에 회사에서 기술 트렌드에 대한 세미나 주제를 공모했는데 당연하게도 모두의 화두는 ChatGPT였다.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ChatGPT와 관련된 다양한 책들이 출판되고 있는 걸 알았는데, 그중에서도 김대식 교수의 ‘ChatGPT에게 묻는 인류의 미래’라는 책이 단연 눈에 들어왔다. 김대식 교수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알려진 뇌과학자이고, 뇌과학자가 ChatGPT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대화한다면 분명 나보다 훨씬 더 풍부한 질문을 해 주셨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책은 ChatGPT와의 만남 이외에 총 10가지 큰 주제에 대한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ChatGPT는 이미 알고 있듯이 대부분 굉장히 바른 대답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질문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많은 질문에 대해 ChatGPT가 하는 대답은 꽤 흥미로웠다. 모든 주제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는 ’09. 죽음에 관하여’였다. ‘죽음에 관하여’가 다른 주제들과 다르게 느껴졌던 이유는 ‘불멸’에 관한 대화 때문이다. 김대식 교수와 ChatGPT는 인간의 불멸에 대해, 인간의 뇌를 인터넷에 업로드 하는 연구에 대해, 디지털 불멸에 대화를 나눈다.
무언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전이 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례가 있겠지만, 앞선 두 가지 사례는 모두 인간의 존재를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불멸을 추구해 왔다. 불로장생 하는 약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현대의 ‘디지털 불멸’까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래 왔다. 기술 분야에서는 인간의 뇌를 분석해서 사람의 기억을 클라우드에 업로드 하고 영원불멸의 존재가 될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뇌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아직도 그 연구는 해야 할 일의 겨우 0.00……….1%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ChatGPT로 좀 더 쉬운 방법을 생각해 보자. Michelle Huang 처럼 개인의 기록을 꾸준히 학습시킨다고 해보자. 학습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휴대폰에 App을 설치하고 내가 휴대폰을 쓰는 모든 기록을 클라우드에 올려 ChatGPT가 누적으로 학습하면 된다. 그 기록들에는 카톡 대화도 있고, 카드를 쓴 문자 메시지, 사진, 운동 기록, 모든 SNS, 전화 기록(통화 녹음도) 등등 나보다 나를 더 잘 표현하는 기록들이 포함될 것이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유의미한 기간이라면 ChatGPT는 ‘과거의 나’가 아니라 ‘현재의 나’가 될 수 있고, 어쩌면 한 인간의 수명이 다한 후에도 그 순간에 멈춘 ‘나’는 남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남아 있는 ‘나’는 여전히 나를 그리워하는 가족들과 대화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의 뇌를 연구해서 클라우드에 올린다고 해도 여전히 ‘불멸과 존재’에 대한 정의와 의미는 모호하다. 그렇다면 ChatGPT가 보여준 이런 가능성 또한 ‘불멸과 존재’에 대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불멸에 대한 욕망으로 그동안 인간이 시도해 왔던 다양한 방법들처럼 ChatGPT 또한 수많은 시도 중에 하나뿐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역사속에서 추구해 온 어느 방법보다 현실화가 가능하리라는 점에서 나는 ChatGPT라는 멈출 수 없는 미래가 두렵다.
| IT기업에서 오래 숙성되고 있는 와인같은 엔지니어. 인문학을 사랑하고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이 있고 그래서 과학과 인문학 그 어디쯤을 여행하는 휴먼. |
#인공지능윤리를묻다
ChatGPT가 하도 유명해서 관련된 자료나 책을 보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짧은 글을 써보려고 한다. GPT 엔진을 알게 된 때부터 잠깐 얘기를 하고 가야겠다. GPT1 엔진이 처음 나온 건 2018년이다. 이후로 업그레이드를 통해 GPT3 엔진이 나온 건 2020년이다. 물론 인공지능의 역사를 보면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성과이긴 하지만 최근 몇 달간 ChatGPT가 보여준 발전 속도만큼 빠른 건 아니었다. GPT 엔진을 알게 된 건 GPT3 때였는데 사실 이 때도 그리 크게 관심을 갖진 않았다. 두 번의 암흑기를 거치면서도 계속 새로운 서비스는 나왔고, 알파고 이후에 AI 분야는 그야말로 호황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문난 잔치에 먹을게 없는 것처럼 딱히 특별하다 싶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GPT3가 출시 되었을 때는 챗봇도 아니었고 UI(User Interface)라고 할 것도 딱히 없어서 아주 엔지니어적인 화면(하얀 바탕, 까만 글씨)으로 테스트 해 본 정도였다. 이후에 이미지 생성 AI인 DALL-E가 나왔으나 이 분야에 관심이 적다 보니 이 또한 호기심에서 몇 번 해보고 말았다. 이후에 GPT3.5를 기반으로 ChatGPT가 나왔을 때도 별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보게 된 기사로부터 ChatGPT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최초의 기사는 어디였는지 아쉽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사는 ‘Michelle Huang’이라는 분이 ChatGPT에게 본인의 어린 시절 일기장을 학습시킨 내용이었다. 이분은 트위터를 통해 대화를 공개했고, 나는 일일이 영어로 된 트윗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는지는 의문이지만, ChatGPT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Michelle Huang은 자신이 어렸을 때 썼던 일기장으로 ChatGPT를 학습시켰다. 그렇다면 ChatGPT는 무엇이 될까? 바로 어린 시절의 Michelle huang이 된다. 그리고 ‘현재의 나’는 ChatGPT를 통해 어린 시절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 이 과정과 내용은 트위터에 상세히 올라가 있다(링크). 누구나 생각해봤던 일이 아니었을까? 아니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제는 많이 잊혀져 어렴풋하게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나와 이야기해 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가끔 해봤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을 학습한 ChatGPT가 실제화된 개인도 아닌데 너무나 사람처럼 대답 하는 터라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묘하게 몰입이 된다. 이 사례로부터 ChatGPT에 대해 급격하게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때는 단지 기술이 궁금했고 이 ‘어린 시절의 나와의 대화’가 왜 그렇게 크게 끌렸는지에 대해 내 스스로도 잘 몰랐던 것 같다.
최근에 회사에서 기술 트렌드에 대한 세미나 주제를 공모했는데 당연하게도 모두의 화두는 ChatGPT였다.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ChatGPT와 관련된 다양한 책들이 출판되고 있는 걸 알았는데, 그중에서도 김대식 교수의 ‘ChatGPT에게 묻는 인류의 미래’라는 책이 단연 눈에 들어왔다. 김대식 교수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알려진 뇌과학자이고, 뇌과학자가 ChatGPT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대화한다면 분명 나보다 훨씬 더 풍부한 질문을 해 주셨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책은 ChatGPT와의 만남 이외에 총 10가지 큰 주제에 대한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ChatGPT는 이미 알고 있듯이 대부분 굉장히 바른 대답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질문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많은 질문에 대해 ChatGPT가 하는 대답은 꽤 흥미로웠다. 모든 주제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는 ’09. 죽음에 관하여’였다. ‘죽음에 관하여’가 다른 주제들과 다르게 느껴졌던 이유는 ‘불멸’에 관한 대화 때문이다. 김대식 교수와 ChatGPT는 인간의 불멸에 대해, 인간의 뇌를 인터넷에 업로드 하는 연구에 대해, 디지털 불멸에 대화를 나눈다.
무언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전이 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례가 있겠지만, 앞선 두 가지 사례는 모두 인간의 존재를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불멸을 추구해 왔다. 불로장생 하는 약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현대의 ‘디지털 불멸’까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래 왔다. 기술 분야에서는 인간의 뇌를 분석해서 사람의 기억을 클라우드에 업로드 하고 영원불멸의 존재가 될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뇌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아직도 그 연구는 해야 할 일의 겨우 0.00……….1%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ChatGPT로 좀 더 쉬운 방법을 생각해 보자. Michelle Huang 처럼 개인의 기록을 꾸준히 학습시킨다고 해보자. 학습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휴대폰에 App을 설치하고 내가 휴대폰을 쓰는 모든 기록을 클라우드에 올려 ChatGPT가 누적으로 학습하면 된다. 그 기록들에는 카톡 대화도 있고, 카드를 쓴 문자 메시지, 사진, 운동 기록, 모든 SNS, 전화 기록(통화 녹음도) 등등 나보다 나를 더 잘 표현하는 기록들이 포함될 것이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유의미한 기간이라면 ChatGPT는 ‘과거의 나’가 아니라 ‘현재의 나’가 될 수 있고, 어쩌면 한 인간의 수명이 다한 후에도 그 순간에 멈춘 ‘나’는 남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남아 있는 ‘나’는 여전히 나를 그리워하는 가족들과 대화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의 뇌를 연구해서 클라우드에 올린다고 해도 여전히 ‘불멸과 존재’에 대한 정의와 의미는 모호하다. 그렇다면 ChatGPT가 보여준 이런 가능성 또한 ‘불멸과 존재’에 대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불멸에 대한 욕망으로 그동안 인간이 시도해 왔던 다양한 방법들처럼 ChatGPT 또한 수많은 시도 중에 하나뿐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역사속에서 추구해 온 어느 방법보다 현실화가 가능하리라는 점에서 나는 ChatGPT라는 멈출 수 없는 미래가 두렵다.
#인공지능윤리를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