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내림 나(B-flat)단조, op. 23(이하 ‘차피협’)의 도입부는 워낙 유명해서, 그 부분에 내재한 어떤 대중적 DNA 때문에 유명해졌는지, 아니면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유명해져서 대중적으로 된 곡인지는 분간이 안 갈 정도다. 게다가 솔직히 아마추어적인 감각으로는, 조성 또한 단조보다는 장조에 가까운 건 아닌가도 싶은. 잠깐, 여기서 그래도 이왕 언급한 만큼 인명의 표기에 대한 언급을 잠깐만 하고 넘어가자. 이 작곡가의 이름은 원 국적어로 표기한다면 Пётр Ильич Чайковский처럼 생소한 키릴 문자로 쓰여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로마자 표기인 Pyotr Ilyich Tchaikovsky가 훨씬 익숙한데, 한때 외래어 표기로는 ‘차이코프스키’가 흔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의 표기 용례에 따르면, ‘차이콥스키’가 옳다고 한다(사실 관습적으로 전자에 익숙하기에 표기법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습관이 무섭다고, 계속 어색하다).
@ Seong-Jin Cho :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20210508 München)
예고상 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한 작품을 소개하겠다고 했기에, 그 답부터 대뜸 이야기하나 싶은 독자께서 꽤 많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조금만 센스를 발휘하시면, 딴소리라는 정도는 눈치를 채실 수도 있다고 짐작해 본다. 왜냐하면 분명히, 대작이라는 수사를 붙이는 법은 없는, 어떤 영화의 OST라고 했기 때문에.
이번 꼭지에서는, 궁금히 (그래서 못 견디실 정도인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리셨던 분들께는 무척 죄송하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한 번만 더 인내심을 발휘하시도록 청을 드리며 그 이야기를 미루고, 세간에서 느닷없다 할 만큼 순식간에 땡땡해진 풍선의 바람 좀 빼고 넘어가려 한다.
사실 어떤 곡이 유명하다고 하면, 그만큼 한편으론 식상해질 만큼 귀에 익기도 해서 굳이 또 찾아서는 잘 안 듣게 되기도 하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차피협 또한 예외는 아니다. 고전음악이라고는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귀마저도 사로잡는 그 도입부의,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 매력이랄까 아우라는 생각하면 할수록 기이하다 해도 부족할 만큼 신기할 따름이지만, 내 최애 곡도, 협주곡들만 놓고 봐도 최애 협주곡도 아니긴 하니, 이런 자리에서 이를 언급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러함에도, 또 굳이, 그런 곡을 찾아 듣게 만드는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연주자다. 어지간해서는 잠깐 언급한 대로 단순히 집에 있는 음반이나 온라인 음원을 찾아 듣는 시도조차 귀찮을 만큼 식상한 면이 늘 한쪽에 존재함은 사실이지만,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서는, 집 안에서가 아니라, 밖으로 꽤 멀리 찾아가는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마다하지 않기도 하는 법이다. 만사가 귀찮은 상태를 극복하게 이끌 정도의 강력함을 지닌 연주자의 실연이라면, 이를 직접 듣기 위해서는, 표를 확보하는 일부터 해서 (여기서 물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그 과정의 복잡다단한 디테일을 다 밝힐 자리는 아니므로 생략하지만) 일상이 여간 더 번거로워지는 게 아님은 물론, 심지어 ‘이러고 있는 게 제정신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지경에도 이른다.
그렇게 해서, 근래에 정말 오랜만에 다시 (그것도 극적으로, 이틀 연속으로) 접한 차피협은, 뜻밖에도 (그리고 한편으론 오롯이는 집중하지 못한 까닭에 푯값이 아깝게도) 감상하는 중간중간 혁신 내지는 혁명에 대한 단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돌아보면, 차피협이 어떤 곡인가?
이 곡을 두고 표현은 그렇게 직접 대놓고 하지는 않았더라도, 탄생한 당시의 분위기를 보면, 이에 대한 당대 대가인 루빈시테인의 반응이란,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고도 남을 만큼 형편없다는 투였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요즘 항간의 화두로 급부상한 chatGPT에 대한 사람들, 특히 전문가들의 반응은 어떤 편인가?
chatGPT에 사람들이 와글와글 신기해하며 놀라움과 기대를 머금고 한편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당연히 공존하지만, 제아무리 hot하다고 해도 차피협(상기드리자면 1번에 한한 이야기다)에 대한, 당대 권위자의 첫 대쪽 비판과 같은 신랄하거나 가혹한 (가령, 갖다 버리라는 식의) 반응은 chatGPT를 두고는 살펴볼 수 없어, 적어도 차피협(또는 후대에 명작으로 알려졌으나 첫선을 보였을 당시엔 만만찮은 산고나 고초를 치른, 음악사의 역대 혁신작)만큼 간극이 큰, 파격적인 혁신이나 충격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새록새록 꼬리를 물었다. 물론 이걸 쟁론화하면 세세히 따지면서 격론이 오갈 수 있으나, 한 가지 확실히 언급할 수 있는 건, chatGPT가 breakthrough적 혁신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이 경우에도 ‘혁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결론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들어간 리소스를 고려해 보면 더더욱 의구심은 커진다.
하여, 혁신이라고 하면, 단절적인 종류도, 연속적인 종류도 있기에 다소 어휘의 선택이 부적절한가도 싶다. 그럼, ‘혁명’이냐 아니냐, 이렇게 물어야 할까? chatGPT라는 이름의 'T'는 transformer를 말하는데, 사실 트랜스포머라면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 영화의 영향으로 ‘변신 로봇’이 일착으로 떠오르는 분도 많겠지만, 같은 결의 말 가운데 요즘에는 digital transformation이라고 할 때 자주 들리는 그 단어가 바로 ‘혁신’이기도 하다(innovatoin하고는 뭐가 다른가는 소위 TMI니 따지지는 말자. 조금 더 사전적으로 ‘전환’이라고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 차피협은 혁신인가? 작품을 낱낱이 분석하는 지면은 아니니 거두절미하고, 적어도 도입부만큼은 혁신을 넘어,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하다. 왜냐하면 (내가 모든 피아노 협주곡을 다 들어본다는 일은 불가능해도, 또 sampling이 모자라지는 않을 경험치로 흔히 유형화가 가능한 범주에 비추어 보면) 작품이 진행되면서 뒤에서는 어떤 흔적도 명료히 보이지 않을 패시지로 도입부를, 그것도 몇 마디 길게 가지도 않은 단숨에, 후대에 대대로 사랑받을 매력 덩어리를 제시했음을 떠올려 보면, 그야말로 충격 자체기 때문이다.
반면에 chatGPT는 정말 많이 양보하고 양보해서 일종의 연속적 혁신 정도에는 간신히 포함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마저도 개인적으론 석연찮다. 지금 보이는 chatGPT의 놀라운, 그리고 현혹적 성능의 뿌리는 한마디로 ‘언어 모델’이다. 주로 통계적 용례(곧, 데이터)에 기반한 언어 모델은,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럴듯하게 말은 정말 잘하게, 바르든 아니든 '정보'를 잘 표현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철저하게 computational한 logic으로 언어(엄밀히는 ‘자연어’)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확률·통계적 감각을 가미한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으므로, 결국, 가령, 고유한 명칭이나 출처를 언급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환각’ (이는 chatGPT를 개발한 OpenAI에서 직접 채택한 표현이다) 증세를 심각하게 보이는 특징이 있다. 쉽게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이름이나 자료명을 막 그럴싸하게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한편으로 불리기를 생성(적) AI(generative AI)라고 하는 유형의 치명적 단점이기도 하다(특히 말을 구사하는 측면에서는 더더욱).
chatGPT는 그래서 딱 transformer 정도인 듯하다. 차피협 실연을 듣고는 한 2주 정도 뒤에, 테마의 부제가 ‘transformer’인 피아노 독주회가 열린다고 해서, 바로 그 이름에 꽂혀서 직접 들으러 연주회장을 찾았다. 혹시 또 모를 생각의 가지가 쳐질까 하여서도. 프로그램된 곡목들에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날 연주는 한 작곡가만의 곡들, 그중에서도 변주곡과 편곡 중심으로 구성된 까닭에 그런 부제가 달린 모양이었다. 이날 독주자가 어디까지 의도한 부제인지는 언젠가 확인을 다시 해볼 수 있지 않을까도 싶지만, 혹시 요즘의 이 chatGP'T'에 착안하여, 트렌드에 따라 transformer란 컨셉을 잡았을 가능성은 없는지도 궁금해졌다.
아무튼 AI 분야 연구를 직접 수행하는 개인적 위치에서 봤을 때, chatGPT(의 발전상과 제한적 효용을 부인하는 의도는 아니지만)에 대한 장안의 온도는 기형적으로, 심지어 불필요하게 높아 보이며, 부당하거나 비윤리적인 사익으로 이어질 위험까지도 감지된다. (물론 나는 그 어느 분야보다도 단절적이거나 파괴적 혁명을 인류 문명에 번번 안겨준 세계에 가까운 전공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혁신이나 혁명과 같은 그런 단어들의 적용 잣대가 알게 모르게 무척 깐깐한 편임도 자인한다.) 그래서도, 피아노가 즐겁다. 어지간한 변화나 새로움에 대해서는 놀라는 법이 흔하지 않은 내게, 피아노라는 악기와 피아노로 연주하는 곡들이 생성하는 우주는 파격투성이라서다. 그렇게 경우의 수가 늘어나면 파격이 파격이 아닐진대, 꼭 그렇지만도 않은 세계가 무한히 펼쳐진다는 그 자체가 혁명적 파격이다.
#과학자와피아노 #인공지능윤리를묻다
- 다음 편에서 계속 -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내림 나(B-flat)단조, op. 23(이하 ‘차피협’)의 도입부는 워낙 유명해서, 그 부분에 내재한 어떤 대중적 DNA 때문에 유명해졌는지, 아니면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유명해져서 대중적으로 된 곡인지는 분간이 안 갈 정도다. 게다가 솔직히 아마추어적인 감각으로는, 조성 또한 단조보다는 장조에 가까운 건 아닌가도 싶은. 잠깐, 여기서 그래도 이왕 언급한 만큼 인명의 표기에 대한 언급을 잠깐만 하고 넘어가자. 이 작곡가의 이름은 원 국적어로 표기한다면 Пётр Ильич Чайковский처럼 생소한 키릴 문자로 쓰여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로마자 표기인 Pyotr Ilyich Tchaikovsky가 훨씬 익숙한데, 한때 외래어 표기로는 ‘차이코프스키’가 흔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의 표기 용례에 따르면, ‘차이콥스키’가 옳다고 한다(사실 관습적으로 전자에 익숙하기에 표기법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습관이 무섭다고, 계속 어색하다).
@ Seong-Jin Cho :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20210508 München)
예고상 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한 작품을 소개하겠다고 했기에, 그 답부터 대뜸 이야기하나 싶은 독자께서 꽤 많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조금만 센스를 발휘하시면, 딴소리라는 정도는 눈치를 채실 수도 있다고 짐작해 본다. 왜냐하면 분명히, 대작이라는 수사를 붙이는 법은 없는, 어떤 영화의 OST라고 했기 때문에.
이번 꼭지에서는, 궁금히 (그래서 못 견디실 정도인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리셨던 분들께는 무척 죄송하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한 번만 더 인내심을 발휘하시도록 청을 드리며 그 이야기를 미루고, 세간에서 느닷없다 할 만큼 순식간에 땡땡해진 풍선의 바람 좀 빼고 넘어가려 한다.
사실 어떤 곡이 유명하다고 하면, 그만큼 한편으론 식상해질 만큼 귀에 익기도 해서 굳이 또 찾아서는 잘 안 듣게 되기도 하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차피협 또한 예외는 아니다. 고전음악이라고는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귀마저도 사로잡는 그 도입부의,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 매력이랄까 아우라는 생각하면 할수록 기이하다 해도 부족할 만큼 신기할 따름이지만, 내 최애 곡도, 협주곡들만 놓고 봐도 최애 협주곡도 아니긴 하니, 이런 자리에서 이를 언급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러함에도, 또 굳이, 그런 곡을 찾아 듣게 만드는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연주자다. 어지간해서는 잠깐 언급한 대로 단순히 집에 있는 음반이나 온라인 음원을 찾아 듣는 시도조차 귀찮을 만큼 식상한 면이 늘 한쪽에 존재함은 사실이지만,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서는, 집 안에서가 아니라, 밖으로 꽤 멀리 찾아가는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마다하지 않기도 하는 법이다. 만사가 귀찮은 상태를 극복하게 이끌 정도의 강력함을 지닌 연주자의 실연이라면, 이를 직접 듣기 위해서는, 표를 확보하는 일부터 해서 (여기서 물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그 과정의 복잡다단한 디테일을 다 밝힐 자리는 아니므로 생략하지만) 일상이 여간 더 번거로워지는 게 아님은 물론, 심지어 ‘이러고 있는 게 제정신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지경에도 이른다.
그렇게 해서, 근래에 정말 오랜만에 다시 (그것도 극적으로, 이틀 연속으로) 접한 차피협은, 뜻밖에도 (그리고 한편으론 오롯이는 집중하지 못한 까닭에 푯값이 아깝게도) 감상하는 중간중간 혁신 내지는 혁명에 대한 단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돌아보면, 차피협이 어떤 곡인가?
이 곡을 두고 표현은 그렇게 직접 대놓고 하지는 않았더라도, 탄생한 당시의 분위기를 보면, 이에 대한 당대 대가인 루빈시테인의 반응이란,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고도 남을 만큼 형편없다는 투였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요즘 항간의 화두로 급부상한 chatGPT에 대한 사람들, 특히 전문가들의 반응은 어떤 편인가?
chatGPT에 사람들이 와글와글 신기해하며 놀라움과 기대를 머금고 한편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당연히 공존하지만, 제아무리 hot하다고 해도 차피협(상기드리자면 1번에 한한 이야기다)에 대한, 당대 권위자의 첫 대쪽 비판과 같은 신랄하거나 가혹한 (가령, 갖다 버리라는 식의) 반응은 chatGPT를 두고는 살펴볼 수 없어, 적어도 차피협(또는 후대에 명작으로 알려졌으나 첫선을 보였을 당시엔 만만찮은 산고나 고초를 치른, 음악사의 역대 혁신작)만큼 간극이 큰, 파격적인 혁신이나 충격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새록새록 꼬리를 물었다. 물론 이걸 쟁론화하면 세세히 따지면서 격론이 오갈 수 있으나, 한 가지 확실히 언급할 수 있는 건, chatGPT가 breakthrough적 혁신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이 경우에도 ‘혁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결론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들어간 리소스를 고려해 보면 더더욱 의구심은 커진다.
하여, 혁신이라고 하면, 단절적인 종류도, 연속적인 종류도 있기에 다소 어휘의 선택이 부적절한가도 싶다. 그럼, ‘혁명’이냐 아니냐, 이렇게 물어야 할까? chatGPT라는 이름의 'T'는 transformer를 말하는데, 사실 트랜스포머라면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 영화의 영향으로 ‘변신 로봇’이 일착으로 떠오르는 분도 많겠지만, 같은 결의 말 가운데 요즘에는 digital transformation이라고 할 때 자주 들리는 그 단어가 바로 ‘혁신’이기도 하다(innovatoin하고는 뭐가 다른가는 소위 TMI니 따지지는 말자. 조금 더 사전적으로 ‘전환’이라고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 차피협은 혁신인가? 작품을 낱낱이 분석하는 지면은 아니니 거두절미하고, 적어도 도입부만큼은 혁신을 넘어,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하다. 왜냐하면 (내가 모든 피아노 협주곡을 다 들어본다는 일은 불가능해도, 또 sampling이 모자라지는 않을 경험치로 흔히 유형화가 가능한 범주에 비추어 보면) 작품이 진행되면서 뒤에서는 어떤 흔적도 명료히 보이지 않을 패시지로 도입부를, 그것도 몇 마디 길게 가지도 않은 단숨에, 후대에 대대로 사랑받을 매력 덩어리를 제시했음을 떠올려 보면, 그야말로 충격 자체기 때문이다.
반면에 chatGPT는 정말 많이 양보하고 양보해서 일종의 연속적 혁신 정도에는 간신히 포함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마저도 개인적으론 석연찮다. 지금 보이는 chatGPT의 놀라운, 그리고 현혹적 성능의 뿌리는 한마디로 ‘언어 모델’이다. 주로 통계적 용례(곧, 데이터)에 기반한 언어 모델은,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럴듯하게 말은 정말 잘하게, 바르든 아니든 '정보'를 잘 표현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철저하게 computational한 logic으로 언어(엄밀히는 ‘자연어’)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확률·통계적 감각을 가미한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으므로, 결국, 가령, 고유한 명칭이나 출처를 언급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환각’ (이는 chatGPT를 개발한 OpenAI에서 직접 채택한 표현이다) 증세를 심각하게 보이는 특징이 있다. 쉽게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이름이나 자료명을 막 그럴싸하게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한편으로 불리기를 생성(적) AI(generative AI)라고 하는 유형의 치명적 단점이기도 하다(특히 말을 구사하는 측면에서는 더더욱).
chatGPT는 그래서 딱 transformer 정도인 듯하다. 차피협 실연을 듣고는 한 2주 정도 뒤에, 테마의 부제가 ‘transformer’인 피아노 독주회가 열린다고 해서, 바로 그 이름에 꽂혀서 직접 들으러 연주회장을 찾았다. 혹시 또 모를 생각의 가지가 쳐질까 하여서도. 프로그램된 곡목들에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날 연주는 한 작곡가만의 곡들, 그중에서도 변주곡과 편곡 중심으로 구성된 까닭에 그런 부제가 달린 모양이었다. 이날 독주자가 어디까지 의도한 부제인지는 언젠가 확인을 다시 해볼 수 있지 않을까도 싶지만, 혹시 요즘의 이 chatGP'T'에 착안하여, 트렌드에 따라 transformer란 컨셉을 잡았을 가능성은 없는지도 궁금해졌다.
아무튼 AI 분야 연구를 직접 수행하는 개인적 위치에서 봤을 때, chatGPT(의 발전상과 제한적 효용을 부인하는 의도는 아니지만)에 대한 장안의 온도는 기형적으로, 심지어 불필요하게 높아 보이며, 부당하거나 비윤리적인 사익으로 이어질 위험까지도 감지된다. (물론 나는 그 어느 분야보다도 단절적이거나 파괴적 혁명을 인류 문명에 번번 안겨준 세계에 가까운 전공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혁신이나 혁명과 같은 그런 단어들의 적용 잣대가 알게 모르게 무척 깐깐한 편임도 자인한다.) 그래서도, 피아노가 즐겁다. 어지간한 변화나 새로움에 대해서는 놀라는 법이 흔하지 않은 내게, 피아노라는 악기와 피아노로 연주하는 곡들이 생성하는 우주는 파격투성이라서다. 그렇게 경우의 수가 늘어나면 파격이 파격이 아닐진대, 꼭 그렇지만도 않은 세계가 무한히 펼쳐진다는 그 자체가 혁명적 파격이다.
#과학자와피아노 #인공지능윤리를묻다
- 다음 편에서 계속 -
블랙소스 :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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