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과학을 위한 변명 부록 #1] 창조론의 다양한 갈래
지난 연재에서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진화론과 성경을 양립 가능한 것으로 본다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 과학자들과 창조과학자들이 말하는 ‘두 권의 책’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죠. 두 권의 책 중에서 창조과학자들은 성경을 더 중요시하고,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자연을 더 중요시한다고 단순하게 구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 글에서는 창조과학이라는 메인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서, 서로 충돌하는 것 같은 기독교의 창조론과 과학의 진화론이 어떻게 갖가지 방법 “타협”을 이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로 “타협”은 아마 창조과학자들이 “진화” 다음으로 가장 싫어하는 단어일 겁니다.)
[얼마나 싫었으면 이런 책까지 나왔을까요. 이 책을 쓴 창조과학자인 이재만 선교사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언급하려고 합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서도 창조과학 논쟁에 대해 적당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아마 이 논쟁에서 과학과 종교, 진화론과 창조론이라는 두 축만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진화론쪽 극단인 ‘자연주의적 진화론’과 창조론쪽 극단인 ‘젊은 지구 창조론’ 사이에는 다양한 “기원 이론”들이 존재합니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어떻게 타협점을 찾을지는 신앙을 가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여기서는 제럴드 라우가 쓴 『한눈에 보는 기원 논쟁』을 참고해서 “기원 이론”들을 크게 여섯 그룹으로 나눠서 살펴보겠습니다.
아 참, 여기서 말하는 ‘진화론’은 종의 발생을 설명하는 이론만이 아니라 생명의 기원이나 우주의 기원에 대한 설명까지도 포괄하는, 매우 기독교적인 단어입니다. ‘진화론’이 기독교적인 단어라니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충 현대 과학이 이룩한 성과 중에서 기독교 교리와 배치되는 부분을 전부 포괄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진화론쪽 극단”, “창조론쪽 극단”, “자연주의적 진화론”과 같은 표현들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거나 반감이 생기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소개되는 내용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니, 일단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1. 자연주의적 진화 (naturalistic evolution)
이 모델은 말그대로 초자연적인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무신론)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불가지론) 입장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진화론, 생명의 기원에 관한 여러 가설들, 우주론에 대해서 배울 때 이런 입장에 기초한 과학 이론들을 배웁니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자연주의적 진화 모델을 수용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자연주의적” 같은 수식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2. 비목적론적 진화 (non-teleological evolution)
여기서부터는 우주를 창조한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를 상정한 이론들입니다. 그중에서 ‘비목적론적 진화 모델’은 창조주의 개입이 가장 적은 버전입니다. 이 모델에 따르면 우주는 창조주에 의해 특정한 목적 없이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는 창조주의 어떤 개입도 없이 순수하게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여기까지는 딱히 기독교적 관점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대 과학과 충돌하는 지점도 없죠. 현대 과학은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 아직은 아는 게 없으니까요.
3. 계획된 진화 (planned evolution)
‘계획된 진화 모델’은 비목적론적 진화 모델과 거의 비슷합니다. 단 한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창조에 어떤 목적이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지각을 지닌 존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즉, 창조주는 자연 법칙을 이렇게 저렇게 조율하고 매개 변수를 이렇게 저렇게 조율해서 ‘시작’ 버튼만 누르면 150억 년쯤 후에 우주 어딘가에 있는 어떤 은하의 어떤 항성계의 어떤 행성에서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주가 창조된 이후에는 (비목적론적 진화 모델에서처럼) 창조주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고, 우주는 창조주가 짜넣은 프로그램대로 굴러갔습니다.
[계획된 진화 모델이 말하는 창조주는... 일종의 프로그래머가 아닐까요?]
자연주의적 진화, 비목적론적 진화, 계획된 진화. 이 세 모델을 각각 지지하는 세 명의 과학자가 학회장에 모여서 토론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음... 아마 평화롭고 생산적인 토론이 이루어질 것 같군요.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한다면 말이죠. 위 세 모델은 스티븐 제이 굴드가 주장했던 ‘겹치지 않는 교도권(Non-Overlapping Magisteria, NOMA)’을 충족합니다. “과학은 과학만의 영역이 있고, 종교는 종교만의 영역이 있다.”
4. 인도된 진화 (directed evolution)
‘인도된 진화 모델’은 우주를 창조한 신이 창조 후에도 계속해서 우주의 역사에 개입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기적을 일으키거나, 기도에 응답하는 등의 초자연적인 사건이 우리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창조주는 자신을 경배할 인간을 만들기 위해 우주의 창조 이후부터 지금까지 분주하게 일해왔습니다. 지구 근처에서 초신성이 폭발할 때는 손바닥으로 지구만 살짝 가려주고, 6500만 년 전에 소행성이 떨어졌을 때는 작은 포유류에게 가족들을 데리고 굴을 깊게 파고 숨어 있으라고 말해줬을지도 모릅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이 실재한다는 주장은 당연히 앞서 설명한 세 모델과 충돌합니다.
5. 오래된 지구 창조 (old-earth creation)
이제 모델 이름에 ‘진화’ 대신 ‘창조’가 들어가기 시작하는군요. ‘오래된 지구 창조 모델’은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사건이 우주의 역사에 대한 비유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과학적 사건이라는 주장입니다. 다만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들은 현대 물리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이 밝힌 우주와 지구의 연대기를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의 ‘6일간의 창조’는 어떻게 설명할까요? 다양한 세부 이론들이 있습니다. ‘날-시대 이론’은 창세기에 기술된 6일이 비유적인 표현이며, 각각의 ‘날’이 긴 시간을 의미한다는 주장입니다. ‘간격 이론’은 6일 각각은 문자 그대로의 하루가 맞지만, 각각의 하루 사이에 긴 시간의 간격이 존재한다는 주장입니다.
6. 젊은 지구 창조 (young-earth creation)
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젊은 지구 창조 모델’은 앞선 연재글에서도 설명했었죠. 창세기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과학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이 밝혀낸 우주와 지구, 생명의 역사를 모조리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창조과학 운동의 핵심이 되는 주장이죠. 젊은 지구 창조 모델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살펴볼 기회가 만들 테니, 여기서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창조론자’라고 지칭되는 집단 안에 얼마나 다양한 생각들이 공존하고 있는지 짐작이 되실 겁니다. 창조론자들끼리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운다고 해도 놀랍지 않죠. 특히 젊은 지구 창조 모델을 수용하는 창조과학자들은 다른 모든 모델을 “타협”이라고 간주하고 극렬하게 반대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 “타협”을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 연재 글에 사실과 다른 점이 있거나 창조과학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댓글 또는 ojunjang@gmail.com으로 알려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크프우프크(Kfwfk): 공대를 졸업했고, 출판사에서 과학책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이상한 사람을 볼 때마다 다가가서 말을 거는 상상을 합니다.
#창조과학을위한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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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에서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진화론과 성경을 양립 가능한 것으로 본다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 과학자들과 창조과학자들이 말하는 ‘두 권의 책’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죠. 두 권의 책 중에서 창조과학자들은 성경을 더 중요시하고,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자연을 더 중요시한다고 단순하게 구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 글에서는 창조과학이라는 메인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서, 서로 충돌하는 것 같은 기독교의 창조론과 과학의 진화론이 어떻게 갖가지 방법 “타협”을 이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로 “타협”은 아마 창조과학자들이 “진화” 다음으로 가장 싫어하는 단어일 겁니다.)
[얼마나 싫었으면 이런 책까지 나왔을까요. 이 책을 쓴 창조과학자인 이재만 선교사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언급하려고 합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서도 창조과학 논쟁에 대해 적당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아마 이 논쟁에서 과학과 종교, 진화론과 창조론이라는 두 축만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진화론쪽 극단인 ‘자연주의적 진화론’과 창조론쪽 극단인 ‘젊은 지구 창조론’ 사이에는 다양한 “기원 이론”들이 존재합니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어떻게 타협점을 찾을지는 신앙을 가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여기서는 제럴드 라우가 쓴 『한눈에 보는 기원 논쟁』을 참고해서 “기원 이론”들을 크게 여섯 그룹으로 나눠서 살펴보겠습니다.
아 참, 여기서 말하는 ‘진화론’은 종의 발생을 설명하는 이론만이 아니라 생명의 기원이나 우주의 기원에 대한 설명까지도 포괄하는, 매우 기독교적인 단어입니다. ‘진화론’이 기독교적인 단어라니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충 현대 과학이 이룩한 성과 중에서 기독교 교리와 배치되는 부분을 전부 포괄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진화론쪽 극단”, “창조론쪽 극단”, “자연주의적 진화론”과 같은 표현들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거나 반감이 생기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소개되는 내용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니, 일단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1. 자연주의적 진화 (naturalistic evolution)
이 모델은 말그대로 초자연적인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무신론)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불가지론) 입장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진화론, 생명의 기원에 관한 여러 가설들, 우주론에 대해서 배울 때 이런 입장에 기초한 과학 이론들을 배웁니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자연주의적 진화 모델을 수용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자연주의적” 같은 수식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2. 비목적론적 진화 (non-teleological evolution)
여기서부터는 우주를 창조한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를 상정한 이론들입니다. 그중에서 ‘비목적론적 진화 모델’은 창조주의 개입이 가장 적은 버전입니다. 이 모델에 따르면 우주는 창조주에 의해 특정한 목적 없이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는 창조주의 어떤 개입도 없이 순수하게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여기까지는 딱히 기독교적 관점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대 과학과 충돌하는 지점도 없죠. 현대 과학은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 아직은 아는 게 없으니까요.
3. 계획된 진화 (planned evolution)
‘계획된 진화 모델’은 비목적론적 진화 모델과 거의 비슷합니다. 단 한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창조에 어떤 목적이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지각을 지닌 존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즉, 창조주는 자연 법칙을 이렇게 저렇게 조율하고 매개 변수를 이렇게 저렇게 조율해서 ‘시작’ 버튼만 누르면 150억 년쯤 후에 우주 어딘가에 있는 어떤 은하의 어떤 항성계의 어떤 행성에서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주가 창조된 이후에는 (비목적론적 진화 모델에서처럼) 창조주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고, 우주는 창조주가 짜넣은 프로그램대로 굴러갔습니다.
[계획된 진화 모델이 말하는 창조주는... 일종의 프로그래머가 아닐까요?]
자연주의적 진화, 비목적론적 진화, 계획된 진화. 이 세 모델을 각각 지지하는 세 명의 과학자가 학회장에 모여서 토론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음... 아마 평화롭고 생산적인 토론이 이루어질 것 같군요.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한다면 말이죠. 위 세 모델은 스티븐 제이 굴드가 주장했던 ‘겹치지 않는 교도권(Non-Overlapping Magisteria, NOMA)’을 충족합니다. “과학은 과학만의 영역이 있고, 종교는 종교만의 영역이 있다.”
4. 인도된 진화 (directed evolution)
‘인도된 진화 모델’은 우주를 창조한 신이 창조 후에도 계속해서 우주의 역사에 개입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기적을 일으키거나, 기도에 응답하는 등의 초자연적인 사건이 우리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창조주는 자신을 경배할 인간을 만들기 위해 우주의 창조 이후부터 지금까지 분주하게 일해왔습니다. 지구 근처에서 초신성이 폭발할 때는 손바닥으로 지구만 살짝 가려주고, 6500만 년 전에 소행성이 떨어졌을 때는 작은 포유류에게 가족들을 데리고 굴을 깊게 파고 숨어 있으라고 말해줬을지도 모릅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이 실재한다는 주장은 당연히 앞서 설명한 세 모델과 충돌합니다.
5. 오래된 지구 창조 (old-earth creation)
이제 모델 이름에 ‘진화’ 대신 ‘창조’가 들어가기 시작하는군요. ‘오래된 지구 창조 모델’은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사건이 우주의 역사에 대한 비유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과학적 사건이라는 주장입니다. 다만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들은 현대 물리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이 밝힌 우주와 지구의 연대기를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의 ‘6일간의 창조’는 어떻게 설명할까요? 다양한 세부 이론들이 있습니다. ‘날-시대 이론’은 창세기에 기술된 6일이 비유적인 표현이며, 각각의 ‘날’이 긴 시간을 의미한다는 주장입니다. ‘간격 이론’은 6일 각각은 문자 그대로의 하루가 맞지만, 각각의 하루 사이에 긴 시간의 간격이 존재한다는 주장입니다.
6. 젊은 지구 창조 (young-earth creation)
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젊은 지구 창조 모델’은 앞선 연재글에서도 설명했었죠. 창세기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과학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이 밝혀낸 우주와 지구, 생명의 역사를 모조리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창조과학 운동의 핵심이 되는 주장이죠. 젊은 지구 창조 모델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살펴볼 기회가 만들 테니, 여기서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창조론자’라고 지칭되는 집단 안에 얼마나 다양한 생각들이 공존하고 있는지 짐작이 되실 겁니다. 창조론자들끼리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운다고 해도 놀랍지 않죠. 특히 젊은 지구 창조 모델을 수용하는 창조과학자들은 다른 모든 모델을 “타협”이라고 간주하고 극렬하게 반대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 “타협”을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 연재 글에 사실과 다른 점이 있거나 창조과학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댓글 또는 ojunjang@gmail.com으로 알려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크프우프크(Kfwfk): 공대를 졸업했고, 출판사에서 과학책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이상한 사람을 볼 때마다 다가가서 말을 거는 상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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