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쉽고 과학적인 문자 ‘한글’이 기계화되기 어려웠던 이유
─‘모아쓰기’라는 난제, 그리고 가로쓰기와 한글 전용의 시작
그러나 한글의 기계화는 결코 간단한 과정이 아니었다. 총 24개의 자음과 모음을 26개의 알파벳을 사용하는 로마자 타자기에 이식하는 작업이 왜 어려웠을까? 그것은 한글 자체의 ‘모아쓰기’라는 특성 때문이었다. 초성·중성·종성이 모여 하나의 음절글자를 만드는 한글의 특성상, 각 자음과 모음이 어느 자리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형태가 천차만별로 변했다. 그 모든 변화를 어떻게 모듈화하여 빠르게 입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술적 고민은 지난한 모색을 거쳐 해답을 찾아 나가야 했다.
기술적 난제와 더불어,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사회·문화적 저항이었다. 세로쓰기와 한자 혼용의 쓰기 문화는 1960년대까지도 숨쉬듯 당연했다. 한자 없이 한글만으로, 그것도 세로쓰기가 아닌 가로쓰기로 ‘생활문화’를 변혁하는 것은 가히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 과정의 한 극단에는 모아쓰기라는 한글의 특성마저 해체하는 극단적인 가로쓰기, 즉 풀어쓰기를 주장한 주시경과 ‘한글가로쓰기연구회’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타자기의 글쇠를 옆으로 눕혀 세로쓰기 문서를 타자기로 작성하는 고육책이 나타나기도 했다.
표준화 이전의 한글 타자기들
─5벌식, 4벌식, 3벌식 타자기가 내놓은 ‘한글’을 ‘한글답게’에 대한 각자의 대답
한국전쟁 후 1960년대 초반까지, 군부는 한글 타자기의 최대 수요자로서 타자기 시장의 형성을 이끌었다. 이런 변화의 혜택을 가장 크게 입은 것은 공병우의 세벌식 타자기였다. 해군참모총장이자 해병대 창설자 손원일의 후원하에 공병우 타자기는 빠른 속도로 군에 퍼져 나갔다. 공병우뿐만 아니라 김동훈(5벌식), 백성죽(4벌식) 등 여러 발명가들이 고유의 메커니즘과 자판 배열을 갖춘 가로쓰기 한글 기계들을 시장에 선보였다. 타자기와 마찬가지로 자판을 써서 입력하는 인쇄전신기(텔레타이프) 시장에도 공병우(세벌식) 외에 장봉선(5벌식), 송계범(4벌식) 등이 새로운 제품을 내놓았다.
공병우 타자기가 한글 타자기 시장을 선점했으면서도 시장을 독점하지 못하고 다양한 타자기들이 병존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공병우 타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소비자들이 다른 타자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특히 네모반듯한 글씨에 익숙한 공무원사회와 민간 기업에서는 공병우의 세벌식 타자기가 만들어내는 들쭉날쭉한 글자꼴이 어색해 보였다. 이에 타자기 제조업자들은 가지런하고 네모반듯한 글자를 찍을 수 있는 타자기를 만들어 공병우와 경쟁했다. 이렇게 가지런한 글자를 찍으려면 네 벌 이상의 글쇠가 필요하다. 빠르고 간단하게 글씨를 찍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했던 공병우 타자기와 달리, 4벌식, 5벌식 타자기 개발자들은 네모반듯하고 가지런한 글씨를 찍는 것을 우선시했다.
자판 표준화,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
─공병우 타자기의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투쟁, 민주화운동과의 결합
1969년 7월 28일, 국무총리 훈령 제81호로 한글 타자기와 인쇄전신기의 표준 자판이 공포되었다. 이것은 국가가 제정한 첫 번째 한글 표준 자판으로, 오늘날 한국에서 사용되는 컴퓨터 표준 자판의 원형이 되었다. 특이한 점은 정부가 표준화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기존 사업자들이 채택한 다양한 자판을 무시하고 완전히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 시장에 강제했다. 표준 자판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의 와중에서, 한글 자판은 기술적 평가의 대상을 뛰어넘어 가치 판단과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세벌식 타자기를 만들었던 공병우는 표준 자판에 맞서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였다. 3선개헌을 거쳐 유신으로 치닫던 박정희 정부가 그의 저항을 용납할 리는 없었다. 공병우는 정보 기관의 집요한 회유와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다방면의 탄압을 겪으면서, 공병우와 그 지지자들은 자신의 싸움을 “과학적 진실을 외면하고 탄압하는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공병우는 1981년 미국 체류 중 광주민주화운동 탄압을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되어 전두환 정권 내내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에 머물게 되는데, 대중들 사이에서 공병우의 수난사는 “더 빠르고 효율적이었으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밀려난 세벌식 타자기 이야기”라는 서사로 정리되어, 군사독재의 폐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널리 회자되었다.
공병우 타자기의 유산과 탈네모틀 글꼴 이야기
─PC통신 시대와 퍼스널 컴퓨터에 글꼴로 남은 세벌식 타자기의 흔적
공병우 타자기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글자의 조형적 균형에 대한 배려를 생략하고 극단적으로 효율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받침이 있으나 없으나 모음의 키가 일정했으며, 쌍자음 글쇠를 따로 두지 않아 쌍자음이 들어간 음절글자는 옆으로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곤 했다. 음절글자들이 윗줄을 따라 정렬되고 받침이 있으면 그만큼 아래로 내려오는 특유의 모양은, “빨랫줄에 옷을 널어놓은 모양 같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윽고 1980년대가 되면 공병우 타자기의 글꼴에 적극적인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네모반듯한 글꼴이야말로 한자 시대의 구습”이라며, “탈네모틀 글꼴이야말로 순한글이 지향해야 할 모습”이라는 공세적인 주장이 나타난 것이다. 젊은 한글 디자이너들은 새 시대의 한글 폰트는 적은 수의 모듈을 조합하여 만듦으로써 한글 창제의 원리를 살리고 폰트 제작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병우 타자기와 같이 그런 가능성을 현실에서 구현해줄 수 있는 기계에 관심을 가졌다. 이상철은 1984년 창간된 잡지 『샘이깊은물』의 제호를 위해 철저히 모듈화된 자모를 고안했다. 뒷날 ‘샘이깊은물체’ 또는 ‘샘물체’로 불리게 된 이 글꼴은 대중의 환영을 받은 최초의 탈네모틀 글꼴이다. 안상수는 1985년 기하학적 단순성을 극대화한 ‘안상수체’를 내놓았고, 한재준은 1988년 공병우와의 개인적인 만남을 계기로 공병우와 한재준의 성을 딴 ‘공한체’라는 이름의 폰트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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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쉽고 과학적인 문자 ‘한글’이 기계화되기 어려웠던 이유
─‘모아쓰기’라는 난제, 그리고 가로쓰기와 한글 전용의 시작
그러나 한글의 기계화는 결코 간단한 과정이 아니었다. 총 24개의 자음과 모음을 26개의 알파벳을 사용하는 로마자 타자기에 이식하는 작업이 왜 어려웠을까? 그것은 한글 자체의 ‘모아쓰기’라는 특성 때문이었다. 초성·중성·종성이 모여 하나의 음절글자를 만드는 한글의 특성상, 각 자음과 모음이 어느 자리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형태가 천차만별로 변했다. 그 모든 변화를 어떻게 모듈화하여 빠르게 입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술적 고민은 지난한 모색을 거쳐 해답을 찾아 나가야 했다.
기술적 난제와 더불어,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사회·문화적 저항이었다. 세로쓰기와 한자 혼용의 쓰기 문화는 1960년대까지도 숨쉬듯 당연했다. 한자 없이 한글만으로, 그것도 세로쓰기가 아닌 가로쓰기로 ‘생활문화’를 변혁하는 것은 가히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 과정의 한 극단에는 모아쓰기라는 한글의 특성마저 해체하는 극단적인 가로쓰기, 즉 풀어쓰기를 주장한 주시경과 ‘한글가로쓰기연구회’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타자기의 글쇠를 옆으로 눕혀 세로쓰기 문서를 타자기로 작성하는 고육책이 나타나기도 했다.
표준화 이전의 한글 타자기들
─5벌식, 4벌식, 3벌식 타자기가 내놓은 ‘한글’을 ‘한글답게’에 대한 각자의 대답
한국전쟁 후 1960년대 초반까지, 군부는 한글 타자기의 최대 수요자로서 타자기 시장의 형성을 이끌었다. 이런 변화의 혜택을 가장 크게 입은 것은 공병우의 세벌식 타자기였다. 해군참모총장이자 해병대 창설자 손원일의 후원하에 공병우 타자기는 빠른 속도로 군에 퍼져 나갔다. 공병우뿐만 아니라 김동훈(5벌식), 백성죽(4벌식) 등 여러 발명가들이 고유의 메커니즘과 자판 배열을 갖춘 가로쓰기 한글 기계들을 시장에 선보였다. 타자기와 마찬가지로 자판을 써서 입력하는 인쇄전신기(텔레타이프) 시장에도 공병우(세벌식) 외에 장봉선(5벌식), 송계범(4벌식) 등이 새로운 제품을 내놓았다.
공병우 타자기가 한글 타자기 시장을 선점했으면서도 시장을 독점하지 못하고 다양한 타자기들이 병존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공병우 타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소비자들이 다른 타자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특히 네모반듯한 글씨에 익숙한 공무원사회와 민간 기업에서는 공병우의 세벌식 타자기가 만들어내는 들쭉날쭉한 글자꼴이 어색해 보였다. 이에 타자기 제조업자들은 가지런하고 네모반듯한 글자를 찍을 수 있는 타자기를 만들어 공병우와 경쟁했다. 이렇게 가지런한 글자를 찍으려면 네 벌 이상의 글쇠가 필요하다. 빠르고 간단하게 글씨를 찍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했던 공병우 타자기와 달리, 4벌식, 5벌식 타자기 개발자들은 네모반듯하고 가지런한 글씨를 찍는 것을 우선시했다.
자판 표준화,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
─공병우 타자기의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투쟁, 민주화운동과의 결합
1969년 7월 28일, 국무총리 훈령 제81호로 한글 타자기와 인쇄전신기의 표준 자판이 공포되었다. 이것은 국가가 제정한 첫 번째 한글 표준 자판으로, 오늘날 한국에서 사용되는 컴퓨터 표준 자판의 원형이 되었다. 특이한 점은 정부가 표준화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기존 사업자들이 채택한 다양한 자판을 무시하고 완전히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 시장에 강제했다. 표준 자판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의 와중에서, 한글 자판은 기술적 평가의 대상을 뛰어넘어 가치 판단과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세벌식 타자기를 만들었던 공병우는 표준 자판에 맞서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였다. 3선개헌을 거쳐 유신으로 치닫던 박정희 정부가 그의 저항을 용납할 리는 없었다. 공병우는 정보 기관의 집요한 회유와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다방면의 탄압을 겪으면서, 공병우와 그 지지자들은 자신의 싸움을 “과학적 진실을 외면하고 탄압하는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공병우는 1981년 미국 체류 중 광주민주화운동 탄압을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되어 전두환 정권 내내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에 머물게 되는데, 대중들 사이에서 공병우의 수난사는 “더 빠르고 효율적이었으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밀려난 세벌식 타자기 이야기”라는 서사로 정리되어, 군사독재의 폐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널리 회자되었다.
공병우 타자기의 유산과 탈네모틀 글꼴 이야기
─PC통신 시대와 퍼스널 컴퓨터에 글꼴로 남은 세벌식 타자기의 흔적
공병우 타자기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글자의 조형적 균형에 대한 배려를 생략하고 극단적으로 효율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받침이 있으나 없으나 모음의 키가 일정했으며, 쌍자음 글쇠를 따로 두지 않아 쌍자음이 들어간 음절글자는 옆으로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곤 했다. 음절글자들이 윗줄을 따라 정렬되고 받침이 있으면 그만큼 아래로 내려오는 특유의 모양은, “빨랫줄에 옷을 널어놓은 모양 같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윽고 1980년대가 되면 공병우 타자기의 글꼴에 적극적인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네모반듯한 글꼴이야말로 한자 시대의 구습”이라며, “탈네모틀 글꼴이야말로 순한글이 지향해야 할 모습”이라는 공세적인 주장이 나타난 것이다. 젊은 한글 디자이너들은 새 시대의 한글 폰트는 적은 수의 모듈을 조합하여 만듦으로써 한글 창제의 원리를 살리고 폰트 제작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병우 타자기와 같이 그런 가능성을 현실에서 구현해줄 수 있는 기계에 관심을 가졌다. 이상철은 1984년 창간된 잡지 『샘이깊은물』의 제호를 위해 철저히 모듈화된 자모를 고안했다. 뒷날 ‘샘이깊은물체’ 또는 ‘샘물체’로 불리게 된 이 글꼴은 대중의 환영을 받은 최초의 탈네모틀 글꼴이다. 안상수는 1985년 기하학적 단순성을 극대화한 ‘안상수체’를 내놓았고, 한재준은 1988년 공병우와의 개인적인 만남을 계기로 공병우와 한재준의 성을 딴 ‘공한체’라는 이름의 폰트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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